[김갑수의 영국에서 본 한국] (6) 의회민주주의 본산의 새로운 실험 '연정'

앞의 글에서도 언급했듯 영국은 작년 5월 총선 이후 현재까지 보수당과 자민당의 연립정부가 정권을 잡고 있다. 이는 전시 거국내각을 비롯해 임시로 결성된 그것을 제외하고 영국 의회민주주의 역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연립정부로 기록됐다. 대륙에선 매우 일반적인 연정이 유독 영국에서만 홀대받은 가장 큰 이유는 오랜 시간 양당제에 가까운 정치지형을 유지해 온데다 과반수의 지지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그들의 오랜 전통 때문이다.

즉, 어느 정당이든 국민으로부터 과반의 지지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정권을 유지하는 게 과연 합법적 정통성이 있느냐 하는 의문에 그 누구도 자신 있는 답을 내놓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보수, 노동 양당의 이념적 간극이 워낙 넓은데다 그들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정당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아주 미미했던 것도 연립정부 구성 타진 자체를 어렵게 한 큰 요인이었다.

영국은 선거에서 과반을 획득한 정당이 하나도 없을 경우 '의회가 줄에 매달렸다'고 해 의회정치의 위기로 받아들이고 즉각 의회를 해산한 뒤 재선거를 하는 게 관행이었다. 현재 최초의 연립정부가 역사적인 실험을 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어느 당도 과반의석을 확보하지 못했을 때를 가리켜 '헝 팔리어먼트'(hung parliament, 직역하면 '의회가 매달렸다'는 뜻이지만 '의회가 위기에 처했다'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함)라고 표현하며, 이런 경우 즉각 의회를 해산하고 재선거를 치러왔다. 재밌는 건 매번 그럴 때마다 아슬아슬하게나마 과반의석을 가진 정당이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도 그렇지만 유권자들의 표심만큼 정확하고 무서운 것도 없다는 걸 거기서도 느낄 수 있었다.

작년 선거의 가장 큰 특징은 누가 뭐래도 닉 클렉(Nick Clegg, 참고로 필자가 살던 도시 Sheffield의 Hallam 지역이 그의 선거구였다)이 이끄는 자민당의 돌풍이었다. 특히 지난 글에서 언급한 영국 선거 최초의 TV 토론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세 명이 나란히 서서 하는 토론에서 양극단의 중간에 있는 자민당이 기본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다 젊은 당수인 닉 클렉이 외모나 언변 등 모든 면에서 볼 때 맞춤형 미디어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불과 10% 초중반이었던 당의 지지율이 연일 치솟아 25%를 넘나들면서 무시 못 할 정도가 되면서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특히 그는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젊은 층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는데 이유는 핵심 공약으로 등록금 면제를 내걸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부모에게 의존하는 우리와 달리 고등학교를 마친 다음부터는 모든 걸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는 영국의 젊은이들에게 등록금 면제 공약은 그 어느 당의 어떤 정책보다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자민당의 두 번째 핵심 공약은 선거제도 개혁이었다. 영국은 당 지지도와 상관없이 각 지역구에서 1등을 한 후보가 무조건 의석을 가져가는 이른바 'First Past The Post' 시스템으로 1등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에 투표한 유권자들의 권리가 완전히 무시된다는 일부의 문제제기가 계속 이어져 왔다. 그 핵심 주체가 바로 현 시스템 하에서 가장 손해를 보고 있다고 판단한 자민당이었다.

닉 클렉이 초지일관 '보다 공정한 사회'를 외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근간이랄 수 있는 선거제도에서 다수의 유권자들의 표가 무시되는, 다시 말해 가장 공정해야 할 곳에서 가장 불공정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우려는 25% 안팎의 당지지율을 확보한 자민당이 의석수에서는 10%도 채 가지지 못한 결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선거 후 자민당은 두 연인 사이에서 구애를 받는 한 사람처럼 과반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보수, 노동 양당으로부터 연립정부 구성 제안을 받고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조금은 의외의 선택을 했으니 노동당을 뿌리치고 그들과 정체성 면에서 판이한 보수당을 선택했다.

당의 정체성보다 중요한 건 국민들의 정권교체에 대한 요구이며, 집권당인 노동당을 제2당으로 만든 민심을 대변하는 것이 새 정부의 정통성을 만들어 준다는 믿음이 판단의 근거였다. 그래서 닉 클렉이 부총리를 맡는 등 모두 다섯 명의 장관이 내각에 합류했다. 그리고 1년 후, 자민당과 보수/자민 연정이 위기에 빠졌다. 먼저 자민당이 발의한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국민투표에서 패배했다. 심각한 정치적 위기였다. 그리고 보수당의 '빅 소사이어티' 드라이브에 밀려 등록금 면제 공약이 파기됐다. 오히려 평균 600만 원을 넘지 않던 등록금이 1500만 원 이상으로 치솟았으니 자민당을 지지한 유권자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수밖에.

   
 

최근엔 폭동참가자들에 대한 사법처리를 두고 양당이 전혀 다른 견해를 내놓으면서 연립정부가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는 보도가 줄을 잇고 있다. 초강경으로 일관하자는 보수당과 달리 자민당이 그들의 분노를 이해해야 하고 초범들의 경우 처벌보다는 계도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향후 연정이 붕괴되면서 재선거를 치러야 하는 게 아니냐는 보도가 나올 만큼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고 한다. 의회민주주의의 본산에서 처음 시도된 실험 연립정부, 그 미래는 어떻게 될까. 야권연대, 혹은 연립, 연합 정부 등 다양한 정치실험이 제기되고 있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줄 것 같다.

/김갑수(방송인·영국 셰필드대학 정치학 석사)

 

<김갑수의 영국에서 본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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