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6) 한티 넘어 함안읍성에 들다

오늘은 동행이 늘었습니다. 글쓴이와 매달 같이 답사를 다니는 임경남 회원이 부군과 함께 길을 나선 것입니다. 오늘 걸음은 옛 진해현의 치소가 있던 진동리에서 장터를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곳 진동은 미더덕 산지로 유명합니다. 미더덕은 물에서 나는 더덕이란 뜻인 바다 생물인데, 날로 먹기도 하지만 된장찌개나 갖가지 찜에 넣어 먹는 대표적인 향토음식입니다. 지금이야 여름철이라 구경조차 할 수 없지만 봄철에 찾으면 갯내 가득 머금은 상큼한 미감을 즐길 수 있습니다.

◇한티 가는 길

진동을 나선 길은 국도 79호선과 비슷한 선형을 따릅니다. 바로 이 길이 옛 통영로를 덮어 쓰고 있기 때문인데, 이곳에 길이 열린 지리적 배경은 남북으로 발달한 구조곡에서 말미암았습니다. 북쪽으로 한티를 향해 길을 잡아 나선지 얼마지 않아 마산운전면허시험장을 동쪽에 두고 걷게 되는데, 이곳에서는 청동기~철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된 바 있습니다. 이 유적을 주변에는 이보다 앞선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즐비하답니다. 지난번에 살펴 본 진동유적을 비롯하여 신촌리와 망곡리 일원에도 이 시기 유적이 곳곳에 있고, 그 유적군의 가까이에는 삼국시대의 유적이 자리하고 있어 이 일원에 청동기시대 이래 인간 생활이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항면 외암리에서 본 한티. /최헌섭

면허시험장을 지난 길은 연동마을을 거쳐 망곡리를 지나게 되는데, 일대에는 먼 지질시대의 공룡 발자국 화석이 곳곳에서 관찰됩니다. 기반암이 중생대에 생성된 퇴적암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망곡리를 지난 길은 부평마을을 거쳐 추곡리 외추마을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폐교를 다시 꾸며 쓰고 있는 삼진미술관을 만납니다. 이곳을 지나 대티리 괴정마을 들머리에는 큰 느티나무 정자가 있어 마을 이름이 예서 비롯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이 정자에서 다리품을 쉬면서 한티로 오를 채비를 합니다. 한티 들머리의 마을은 대현(大峴)이니 이제 고개가 지척임을 일러줍니다. 마을 초입에는 경주 김씨 3대 효자각이 있어 이리로 옛길이 지났음을 알겠습니다. 예서 한티로 이르는 길은 국도 79호선의 확장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걸음이의 눈에는 살풍경으로 다가옵니다.

◇한티(한치, 대티, 대현; 大峴)

한티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과 함안군 여항면의 경계에 있는 큰 고개입니다. 당시 진해와 함안의 경계를 이루던 이 고개는 '한티', '한치(限峙)', '대티', '대치(大峙)'라고도 합니다. 모두 큰 고개를 뜻하는 한티에 대한 다른 표기입니다. 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뒤 일본의 침입에 대비해 쌓은 대현관문성(大峴關門城)이 있어 옛길을 헤아리는 좋은 잣대가 됩니다.

대현은 낙남정간의 파산(巴山 : 649.2m)과 생동산(生童山 : 720.3m)사이에 있는데, 남쪽의 해안 지역과 북쪽의 낙동강 유역을 오가는 길이 됩니다. 이 고개의 교통로로서 중요성은 이미 <함주지>에서 지적된 바 있습니다. 이 책 산천에는 "대현이 군성 남쪽 25리인 파산과 생동산 사이에 있다. 가운데 대로(大路)가 있어서 남쪽으로 진해와 통한다. 옛날에는 관문석성(關門石城)이 있었는데, 아직 터가 남아 있다"고 전합니다.

<함주지>에 실린 뒤 오랫동안 존재를 드러내지 않다가 10여 년 전에 글쓴이에게 다시 발견되었습니다. 관문석성은 대현의 양쪽으로 전개되는 마루금에 조성되어 있어, 입면은 마치 기러기가 날개를 펼친 모습입니다. 성을 만든 때는 <일본서기> 흠명기 22(561)년의 "일본에 대비하여 신라가 아라 파사산(波斯山)에 성을 쌓았다" 기사에 근거할 때, 561년 무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라가야가 신라에 영속된 뒤이므로 축성의 주체는 신라이며, 축성목적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대로 바다로부터 침투해 오는 일본에 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기록은 성곽이 축조되면서 고개를 넘나드는 교통로도 아울러 정비되었음을 시사합니다.

◇함안읍성 가는 길

예서 북쪽으로 이르는 길은 한티~태평원(太平院)~이음원(梨陰院)~함안읍성으로 이어집니다. 한티 가까이에는 관문성과 아울러 고개 바로 아래에 태평원이 있었습니다. <함주지>에 "태평원은 군성의 남쪽 25리 되는 병곡리(竝谷里) 대현촌(大峴村)에 있었는데 없어진 뒤 복구하지 않았다"고 나옵니다. 여항면 외암리 원지골로 헤아려집니다. 거기서 북쪽으로 함안을 향해 18리를 더 가면 이음원에 이릅니다. <함주지>에 "이음원은 군성의 남쪽 7리 되는 상리(上里)의 와요동(瓦窯洞)에 있었는데 없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다"고 했습니다. 지금의 강명리 들머리 어디쯤인 것 같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기 어렵습니다. 예서 함안으로 이르는 길에는 작은 내가 여럿 있었는데, 상남 즈음에서 널나무로 만든 판교(板橋)를 지나고, 봉성 들머리에서 장명교(長命橋)를 건넜습니다.

◇봉성 옛길

전통시대 함안군성과 진해현성 사이의 길은 지금의 국도 79호선이 확·포장되기 이전의 선형과 비슷한데, 이곳에서 발굴된 조선시대의 관도가 뒷받침해 줍니다. 도로가 발굴된 곳은 함안면 봉성리 마을숲 남쪽 '숲위들'의 봉성리 1호지석묘 동쪽입니다. 조선시대의 관도는 국도 79호선 아래에서 드러났는데, 이것은 지금의 도로가 옛길을 덮어 쓴 확고한 사례입니다. 옛길은 여항에서 함안면 일원에 발달한 하성충적지의 길이 방향을 따라 조성되었습니다. 폭은 5.2m 정도며, 돌을 줄지어 쌓아 가장자리를 구획하였으나 쓸려 나간 곳이 많습니다. 조사자들은 이 길의 연원을 먼 청동기시대에서 구하고 있는데, 근거는 봉성리와 봉촌리 일원에 분포하는 지석묘를 듭니다. 이 시기부터 인간의 이동으로 자연스럽게 생성 발달한 길을 정비하여 사용한 것이 봉성동에서 발견된 도로로 발전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초 어류 조사서, 김려 선생의 <우해이어보> 옛 진해는 우리나라 최초의 어보인 <우해이어보>의 산실입니다. 유학자 담정(潭庭) 김려(1766~1821)가 천주교 박해에 연루되어 이곳 진해에 유배 와서 1803년에 지었습니다. 정약전의 <현산어보>에 11년이나 앞선 어보(魚譜)입니다. 제목으로 쓰인 우해(牛海)는 넓게는 옛 진해의 앞 바다를 이르고, 좁게는 진동면 고현리 우산 앞 바다를 이릅니다.

진동 서남쪽의 고현 뒷산이 우산(牛山)이니 그 앞바다를 그리 부른 것입니다. 이어보(異魚譜)라 했음은 서울 출신 유학자의 작가적 시점이 잘 반영된 것으로 그에게는 이곳 우해에서 나는 모든 고기가 다 신기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異魚)라 했을 테고, 보(譜)라 했으니 그 고기들에 관한 족보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싶습니다.

그는 옛 진해현의 진동면 율치리 염밭마을에서 유배 살면서 보수 주인집의 열두 살 난 사내아이를 데리고 근해에 나가 고기잡이와 그 생태 관찰하기를 즐겼는데, 서문에 이 저술은 훗날 귀양살이가 풀리면 고향에 가서 유배지 풍물을 얘기하며 즐기기 위한 것이라 술회하였습니다. 본문에는 문절어를 비롯한 52종의 물고기, 바닷게 등 갑각류 7종, 조개 4종, 고둥 6종 등 약 70종에 대한 해설과 당시 진해의 풍물을 노래한 우산잡곡 39수가 실려 있습니다.

이 책의 가치는 무엇보다 우리나라 최초의 어보라는 데 두어집니다. 아울러 당시 우리 지역 어패류의 명칭과 방언명, 별명 등의 기재를 통해 본 언어학적 가치와 각종 바다 생물의 생태, 그 포획 방법, 가공법 등에서 읽을 수 있는 생태학, 어로민속학, 식품학적 가치 또한 뛰어나다 하겠습니다. 특히 일명 가방어(假魚)라고도 하는 방어의 일종인 양타를 잡는 어뢰(魚牢) 또는 어조(魚條)를 소개한 부분은 지금의 어살(어사리 : 어전漁箭)에 대한 19세기 초기의 생생한 증언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우리가 죽방렴(竹防簾)이라는 잘못된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전통시대 함정 어법의 실상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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