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5) 울빛재∼우해(진해)를 지나다

이번 여정은 고성현과 경계를 이루는 울빛재에서 상령역과 진해현을 지나는 구간입니다. 지난 호에서 살펴 본 대로 전통시대의 길은 지금의 국도 14호선과는 판이합니다. 옛길은 배둔에서 고성 회화면 당항리~봉동리~어신리를 지나 울빛재에서 마산 진전면 임곡리로 이른답니다. 이 구간은 지금이야 중심 교통망에서 벗어나 한적한 시골마을이 되었지만, 그래서 옛길의 정서를 느끼며 걸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은 울빛재에서 첫걸음을 뗍니다. 울빛재를 내려서면 곧바로 국도 14호선과 만나게 되어 갑자기 19세기에서 21세기로 떨어진 느낌이랍니다.

◇울빛재(우비치: 牛飛峙)를 넘다 = 울빛재는 지금도 그러하지만 예전에도 고성과 진해현(창원시 마산합포구 삼진 일대)의 경계를 이루던 고개였습니다. 진해의 옛 이름은 우해(牛海)인데, 우산(牛山) 남쪽에 바다를 끼고 있어 붙은 이름입니다. 우해의 우리말은 '쇠바다'이고 우산은 '쇠뫼'입니다.

상령역이 있었던 창원 진전면 지산리 상림 마을 숲. /최헌섭

이것이 동쪽을 뜻하는 '살' '사라'를 훈차 표기한 방위 지명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한 방위 지명이라면, 배둔이나 고성의 동쪽이라 그리 불렀을 터이지만, 이 고개와 가까운 회화면 삼덕리 남산마을에 오래된 쇠부리터가 있음은 그리만 볼 수 없게 합니다. 그것은 우비치(牛飛峙)를 우리말 뜻으로 읽으면, '쇠날재'가 되니 그렇습니다. 고고학을 공부하는 필자는 이 고개 가까운 고성 삼덕리에 쇠부리터가 있어 고개의 이름이 쇠가 나는 고개라는 뜻을 취하기 위해 그리 적은 것은 아니려나 싶기도 합니다. 앞으로 연구가 필요한 대목입니다.

울빛재는 오서리의 외우산(外牛山)과 이명리의 호암산(虎岩山) 사이의 낮은 고개인데, 이 고개를 내려 선 길은 오서리와 이명리 사이로 나옵니다. 오서리와 곡안리의 고인돌무덤과 돌널무덤이 충적지에 널리 분포해 있고, 이와 이어지는 구릉에는 삼국시대의 고분이 떼 지어 분포합니다. 진전면 소재지인 서대마을 배후에는 삼국시대에 쌓은 오래된 성이 있고, 오서리 탑곡산 아래의 탑곡(塔谷)에는 고려시대의 탑재가 널브러져 있는 절터가 있습니다.

울빛재를 내려 선 길은 구릉과 충적지의 점이지대를 따라 열렸을 것으로 헤아려집니다. 해안과 가까운 충적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다의 영향을 받아 염생습지성 식물이 군락을 이루는 간석지여서 길을 열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상령역(常令驛)= 암하를 지나 밤티(율치: 栗峙)를 넘으면 상령역이 있던 지산리에 듭니다. 이곳 밤티 남쪽 바닷가 마을인 율치리 염밭 마을은 우리나라 최초의 어보인 <우해이어보>의 산실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는 듯 모르는 듯 그런 자취조차 찾을 수 없고 율치리 일대는 공장이 들어서면서 옛 경관을 잃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암하에서 밤티를 넘는 길가에는 지금도 오래된 빗돌이 있어 이곳이 옛길임을 일러주며, 밤티는 요즘 지도에는 주치라 적혀 있습니다. 고개는 낮지만 교통상으로는 요충을 이루었던 듯, 이 고개와 덕곡천 일대는 한국전쟁 때 동진하는 북한군을 막아 싸운 격전지였습니다. 지금 이 고갯마루에는 이를 기리는 전적기념비가 있습니다.

고개를 내려 진북면 소재지인 지산리 상림에 들면, 이곳이 바로 상령역 옛터입니다. 역터로 헤아려지는 곳은 상림이라 불리는 마을숲 일원인데, 아마 이곳의 쑤(藪)는 역에 딸린 숲으로 조성되었을 것입니다. 마침 우리 걸음이들이 이곳을 지날 때는 맹하의 기세가 드셀 때였는데, 숲 아래에서는 주민들이 한가롭게 더위를 식히고 있었습니다. 아마 옛 역수(驛樹)가 가진 기능의 하나도 이러하였을 터입니다. 이 역은 고려시대 산남도에 속한 28역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당시의 이름은 상령(常寧)이었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진주 문산읍 소재의 소촌도에 딸린 상령역(常令驛)이 되었습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사무소 안에 남아 있는 진해현 동헌. /최헌섭

◇진해(鎭海) = 옛 진해현(鎭海縣)을 향하는 노정은 상령역을 나서서 동쪽으로 길을 잡습니다. 진해현의 사직단(社稷壇)이 있던 사동리(社洞里) 들머리에서 길가에 세운 정려를 거쳐 사동리를 지나면 곧 현의 치소인 지금의 진동리에 든답니다. 이곳 옛 진해는 청동기부터 삶터를 제공해 왔는데, 최근 택지개발에 따른 발굴조사에서 당시 사람들이 만든 경작지와 수로, 다양한 무덤이 드러나 이 일대가 진동만을 중심으로 한 해양세력의 근거지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옛 진해현성은 충적지에 세운 네모난 평지성입니다. 성에 관한 기록은 <문종실록> 원년 9월 경자에 "진해현 읍성은 둘레가 1325자 4치이고, 여장 높이 3자, 적대 6, 문 3, 옹성 2, 여장 382, 우물 2이다"고 실려 있습니다. 이밖에 지적도를 살펴보면, 성곽의 바깥에 해자를 두른 것으로 보입니다. 성내의 시설물로는 순조 32년(1832)에 현감 이영모(李寧模)가 세운 동헌(東軒) 등의 관아가 진동면사무소 경내에 남아 있고, 1980년대 불 탄 진해현 객사가 삼진중학교에 초석을 남기고 있습니다. 또 관아 밖 길가에는 역대 현감들의 선정비 16기가 남아 옛 시절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진동 성뒤들의 조선시대 도로 표면 흔적.

지적도를 살펴보면, 옛길은 남문과 동문, 북문으로 열렸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곳 현성의 동쪽 성뒤들에서는 조선시대의 도로가 발굴되었습니다. 확인된 구간은 태봉천 배후습지를 통과하기 위해 돌을 고르게 깔아 침하를 막는 공법을 취했습니다. 길바닥에는 잔자갈과 흙을 깔았는데, 바닥에는 수레와 사람이 오감에 따라 가라앉은 자국이 관찰됩니다. 도로의 진행 방향은 동문을 나서서 자연제방을 따라 개설된 길이 이곳에서 배후습지를 통과하여 구릉과 충적지의 점이지대를 따라 동쪽과 북쪽으로 이르는 분기점으로 향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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