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고성 송도역~울빛재

오늘은 처음 통제영을 나설 때의 길벗 세 사람이 온전히 한 조를 이루어 길을 걷습니다. 출발 지점은 버스로 도착한 고성시외버스주차장입니다. 주차장을 나서서 옛 송도역 자리를 헤아리고, 저 멀리 보이는 고자국의 수장 묘역인 송학동고분군과 기월리고분군을 둘러보고 배둔역으로 행선을 잡아 힘차게 출발합니다.

◇송도역을 나서다 = 송도역을 나선 길은 지금의 국도 14호선과 대체로 비슷한 선형을 따라 북쪽으로 이어집니다. 당시 역이 있던 송학동에서 북동쪽으로 바라보이는 넓은 들은 오래 전 바다였던 기억을 품고 있습니다. 대가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밤내를 대체적인 경계로 그 북쪽이 먼 과거에 바다였을 것으로 헤아려집니다. 근거는 지난 호에 살폈던 동외동패총과 고성여중 패총, 송도역의 입지 등에서 헤아릴 수 있는 고성 읍내 일원의 과거 토지이용 방식입니다. 또한 송학동 무기정에 전해지는 기생 월이(月伊)의 이야기도 이런 헤아림의 잣대가 됩니다.

어신리에서 본 울빛재, 봉동리 금봉산골에서 울빛재에 이르는 길은 옛길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어 그림같은 길을 걷게 된다. /최헌섭

지금의 대평리 죽계리 일원의 너른 들이 먼 과거에 바다였으니, 옛 길은 우산리 쪽의 산자락 가까이로 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송도역을 나서서 우산리 외우산마을 가까이로 길을 잡습니다. 이 마을과 대가저수지 사이에는 봉화산(烽火山·275.4m)이라는 구릉이 있습니다. 이곳에 봉수대가 있어 그런가 살펴보니 그 서북쪽으로 3㎞ 정도 떨어진 대가면 양화리의 천왕점(天王岾) 봉수가 있던 봉화산(348m)이 잘못 표기된 것으로 확인됩니다. <동국여지승람> 고성현 봉수에 "천왕점 봉수는 동쪽으로 곡산봉수(동해면 내곡리 봉화산)에 응하고 남쪽으로 우산봉수(통영시 도산면 수월리 봉화산)에 응한다"고 나옵니다.

우산리에서 잘 가꿔진 마을숲을 지나는 마을 어귀에서 '고성농요 창립자 명단비'를 만납니다. 예전에 이곳에 이와 관련한 전수관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어디로 옮겨가고 빗돌만 남았습니다. 고성농요(중요무형문화재 제84-1호)는 고성 지역에 전해오는 노래로 힘든 농사의 피로를 덜고 능률을 올리고자 불렀습니다. 농요를 부르던 장소성과 행위성에 따라 들노래 또는 농사짓기노래라고도 하며, 모내기노래 도리깨소리 삼삼기노래 논매기노래 물레타령 등이 전승됩니다.

우산리를 지난 길은 뗏골 번디실 장명을 지나 산이랄 것도 없는 사월산(101.3m) 동쪽 고개를 넘어 두호리 머리개와 정문동 사이로 들어섭니다. 두호리 머리개는 기생 월이의 숨은 공로가 전해지는 당항포해전과 관련한 지명이며, 정문동은 이곳 길가에 있는 정문(旌門)에서 비롯한 이름입니다. 여기를 지나 소다복치에 이르러 삼락리로 들지 않고, 북쪽으로 곧장 길을 잡습니다. 소다복치를 넘어 부곡마을에서 곧바로 북쪽으로 들면 대다복치를 넘어 보전리 소라골을 지나 도전리 명송마을로 나옵니다. 이리로 길을 잡은 것은 몇 개의 낮은 고개를 넘더라도 그리 가는 게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대다복치를 내려서면, 도전리 명송마을 들머리에서 옛길의 지시물인 빗돌을 만납니다. 예서 화산리로 곧장 이르게 되는데, 화산리(禾山里)는 옛 이름이 법수동(法水洞)입니다. 바로 이곳에 법수 또는 벅수라 부르는 장승이 있었음입니다. <대동여지도> 19-2에는 이곳 화산리에 산성이 있고, 역은 산성의 서남쪽에 그려져 있습니다. 성산에 이어지는 고개를 우배치(牛背峙)라 했는데, 이는 진해현과의 경계 가까이에 있는 우비치(牛飛峙)를 이곳에 잘못 표기한 것입니다. 이 지도에도 나오는 화산리 산성은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전해지며, 성은 구릉의 정상 부위를 따라 쌓은 테뫼식입니다. 화산리를 지나 구만천을 건너 배둔역에 듭니다.

   
 

◇배둔역(背屯驛) = 고려시대 산남도(山南道)의 속역인 배돈역(排頓驛)에서 유래하여 구한말까지 존속한 전통시대의 역입니다.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지금 화산리(禾山里)에 있는 성산(城山)의 남쪽에서 고성만으로 유입되는 마암천의 북쪽 가에 그려져 있는데, 이것이 오류임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습니다.

<한국지명총람>에서 배둔리의 지명 연원을 배가 멈춘 형국에서 구한 것은 배둔역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간과한 것입니다. 배둔역의 관계성은 고려시대 이래의 해안(海岸) 교통로를 이으며, 그 동서로는 진해현의 상령역과 고성의 송도역을 잇습니다.

배둔리는 이곳에 배둔역이 있었기에 비롯한 이름입니다. 고려 적에는 배돈(背頓)이라 했습니다. <동국여지승람> 고성현 역원에는 "현의 북쪽 27리에 있다"고 했습니다. 역이 있던 곳은 지금의 배둔리 중심지 일대입니다. 바로 그곳에는 '박석걸'이란 지명이 남아 있어 길에 바닥돌(박석 : 薄石)을 깔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이 소촌도에 속한 관도가 지나는 곳이며, 가까운 곳에 배둔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16년에 조사한 <방화산(芳華山) 국유림 경계도>에서 보듯, 배둔역은 방화산 남쪽 모퉁이에 있습니다. 이 경계도에는 배둔천을 가운데 두고 북동-남서향의 옛길이 그려져 있으니, 배둔역을 나선 길은 방화산의 남동쪽에서 배둔천을 건너 북동쪽을 지향합니다. 바로 회화농공단지 남쪽에서 진북면 오서리로 이르는 울빛재(우비치 : 牛飛峙)로 길을 잡은 것입니다.

◇울빛재(牛飛峙)로 이르다 = 배둔역을 나선 길은 배둔천을 건너 울빛재로 이릅니다. 회화농공단지가 있는 반곡에서 봉동리 들머리까지는 봉오로와 옛길이 같은 선형이라 그 길을 따라 걷습니다. 예서 봉동리 금봉산골에서 울빛재에 이르는 길은 옛길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어 그림같은 길을 걷게 됩니다. 지금의 봉오로야 경사를 줄이기 위해 산자락을 따라 꾸불꾸불 돌아들지만, 옛길은 불문곡직 고개를 향해 가장 짧은 길을 잡아 오릅니다. 바로 옛길이 경제성을 추구했음입니다. 와우산(190.8m)과 호암산(308.7m) 사이의 함지땅인 어신리는 사진에서 보듯 그림 같은 전원 풍경을 선사합니다. 우리는 다랑이 사이로 난 옛길과 잇닿은 울빛재에 올라 오늘 여정을 맺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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