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이의 향기] 창원시 내서읍 호계리 권영순 씨

경남도민일보는 지난해부터 평범한 우리 이웃 이야기를 지면에 옮기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부터 시작하는 결혼·사망 기사도 그런 시도 가운데 하나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삶 속에서는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찬란한 기억은 결혼일 것이며,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앞으로 이런 이웃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 기록해 나가고자 합니다.

권영순(1948~2011·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호계리) 씨가 지난 5월 29일 산책을 하다가 쓰러져 세상을 등졌다. 향년 63세.

고인은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에서 태어났다. 1974년 스물 여섯이 되던 해 아내 강예순(60) 씨와 결혼해 권상한·쌍호·쌍표 삼 형제를 뒀다.

생전에 손자 준영·진영(왼쪽부터)군과 함께 한 권영순 씨. /권상한

장남인 상한 씨는 "지병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약주를 많이 하셨지만 식사는 잘 안 하셨다"며 "전체적으로 기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그런 변을 당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고인의 고향인 내대리는 지리산 등반길 코스로 유명한 중산리에서 고개 하나 넘으면 있는 마을이다. 고인은 어린 시절 농사를 지었다. 대농까지는 아니었지만 일하는 사람을 둘 정도로 적지 않은 땅을 일궜다. 그러다 10대 후반 아버지를 따라 식구들이 모두 마산으로 오면서 그때부터 마산에서 쭉 살던 중 강예순 씨와 결혼한다. 큰아들 권상한 씨가 어렸을 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이렇다.

"운전을 쭉 하셨어요.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시면 지갑에 돈을 남기지 않으려 했지요. 자신이 뭘 가지려고 하지 않으신 분이에요."

하루 번 수입으로 약주 한 잔 걸치는 일도 잦았다. 그렇다고 술값으로 다 쓰는 것도 아니었다. 지갑에 다만 얼마라도 남아 있으면 고스란히 삼 형제에게 나눠주곤 했다. 지갑에 10만 원이 있으면 3만 원씩, 3만 원이 있으면 1만 원씩 주는 식이었다. 용돈이 아니면 먹을거리나 삼 형제가 갖고 싶어하던 것을 선물로 사오기도 했다. 가진 게 많이 없어서 그렇지 마음 씀씀이는 늘 넘쳤다. 아들에게도 며느리, 손자들에게도 한결같았다. 맏며느리 최양이 씨의 기억이다.

"며느리에게도 뭘 해주고 싶은 것은 많은데 자신이 여력이 없어 스스로 아쉬워하는 부분도 많았어요. 손자들에게는 늘 무엇인가를 쥐여줘야 속이 풀리셨지요."

상을 치른 후 고인의 손자인 준영·진영 군도 그런 할아버지 모습을 그리워했다. 어시장에서 과일을 파는 할머니 가게를 가면 가까운 가게를 데리고 다니며 뭐라도 사줬던 할아버지. 말도 채 배우기 전에 아이들은 '할, 할…'이라 부르며 할아버지를 따라다녔다.

자신이 배운 게 많지 않아 자식에게는 항상 공부를 강조했던 고 권영순 씨. 어렸을 때 운동을 하고 싶었던 상한 씨는 어렵게 아버지에게 허락을 구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단호하게 공부만 할 것을 권했다. 그래도 아들에게 매몰차게 대한 그 기억이 늘 걸린 듯했다. 손자인 준영 군이 야구를 배우겠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 권영순 씨는 이렇게 말했다.

"아들이 하고 싶었던 것을 시켜주지 못했는데, 손자들이라도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지 않겠느냐. 운동하다가 뭐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라. 내가 능력 되는 대로 도와주마."

지난 5월 29일, 고인의 빈소는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중리에 있는 청아병원에 차려졌다. 갑작스러운 이별을 준비하지 못한 가족들은 충격과 슬픔이 뒤섞인 채 49재를 앞두고 있다.

한 번 하지 않겠다고 하면 하지 않고,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상대조차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었다. 말은 적었지만, 누군가에게 뭔가를 항상 주고 싶은 사람이었다. 권상한 씨는 사람들이 아버지를 이렇게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늘 베풀고 싶었지만 가진 게 많지 않아 항상 아쉬워하던 분이었습니다. 받기보다 주고 싶어했지요. 조금 여유가 있었다면 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사람이었다고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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