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3) 도선원∼고성 송도역

통영로 세 번째 나들이는 든든한 길벗 조규탁님과 함께 도선원이 있던 도산면 원산리에서 시작합니다. 2주 만에 찾은 농촌 들녘의 풍광은 그새 많이 달라진 모습입니다. 지난 번 답사 때 한둘씩 시작하던 모내기는 벌써 마쳤고, 일찍 모를 낸 논에는 벌써 착근을 하였는지 제법 세를 불린 모가 더없이 푸르기만 합니다. 길가 밭에서는 잘 자란 옥수수를 거두어들이고 있고, 원동마을 마을숲 앞의 밭에서는 중년의 부부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다정하게 고구마순을 따고 있습니다. 참 보기 좋습니다. 오늘은 이런 전원 사이로 열린 길을 잡아 도선원에서 진태를 넘어 고성의 송도역에 이르는 구간을 걷습니다.

원동 마을에 있는 지석묘. /최헌섭

◇도선원(道善院)에 들다 = 원산리 원동마을을 도선원의 옛터로 보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에 있다. 고성현 역원에 도선원(道善院)이 현의 동쪽 20리라 했으니 그리 헤아릴 수 있다. 원터에는 지금도 고려~조선시대 기와와 질그릇 조각이 흩어져 있고, 주민들은 예전에는 우물도 있었다고 전해 준다. 바로 도선원이 있던 곳은 원동마을 남쪽의 한치 들머리가 되니, 위치로 보아 고성~통영 길손들에게 쓰임이 많았을 것이다.

원터에서 원동마을로 이르는 어귀에는 지석묘 2기가 남아 있다. 전하기로는 원래 10기 정도 있었는데, 경지 정리 때 대부분 매몰되었다. 남아 있는 지석묘 곁에는 소박한 안내판이 있는데, 소가야국 당시의 것이라 적었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에 유행한 무덤 형식이므로 소가야 탄생의 기반이 된 청동기시대의 것이라 해야 한다.

◇고성 송도역(松道驛)에 들다 = 원동~오산(蜈山) 오가는 길이 옛 관도(官途)인데, 바로 이 길의 남쪽(남촌진 남쪽) 밭에서는 예전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돌살촉이 채집된 적이 있다. 그 뒤 구릉에는 중세 이후 조성된 무덤이 여럿 있고, 남촌진을 지나 오산으로 가는 길가에는 칠성바위라는 지석묘가 있다. 경지정리 때 많이 없어지고 지금은 3기만 있지만, 일대가 선사시대 이래 취락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옛길은 바로 여기를 지나는데, 지석묘 동쪽 골짜기에는 조선 전기에 분청과 백자를 구운 사기막(沙器幕)이 있어 선사시대 이래로 인간생활이 집중된 곳임을 일러준다.

원산리 오산마을에서 고성 경계의 고갯길을 넘어 고성의 남쪽 경계 월평리에 든다. 마을 사람들은 진태고개라 하는데, 진태는 긴 고개를 이르고 고개는 태가 티(고개)를 이르는 줄 모르고 붙인 말이다. 이 고개는 일종의 단층처럼 함몰되어 있는데, 바로 이리로 옛길이 열렸던 것이다.

구허역~송도역 옛길은 이곳 월평리까지 국도 14호선과 많이 떨어져 있는데, 그것은 지름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월평리 국도 14호선 양쪽 밭에는 옥수수를 많이 재배하고 있으며, 길가에는 밭에서 수확한 옥수수를 바로 내다파는 가판이 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길을 잡아 신월리에서 국도 14호선과 합쳐져 그 길을 따라 고성에 든다. 옛 지도를 보면 고성읍치의 남산 남쪽에 읍창을 겸한 제민창(濟民倉)이 그려져 있다.

<대동여지도> 19-2에는 고성읍성 남쪽 남산의 남동쪽으로 고개를 넘어 송도역에 이른다. 가는 길에 고성읍 들어서며 작은 재를 넘는데, 양쪽 구릉에 오래된 유적이 있다. 서쪽의 남산에는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전해지는 토성이 있다. 일찍이 <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에 실려 있을 정도인데, 두 책의 고성현 산천에 "남산(南山)은 현의 남쪽 2리에 있는데, 옛 성터가 있다"고 나온다. 이 성은 정상을 따라 쌓은 테뫼식 토성인데, 지금도 곳곳에 당시 토기 조각과, 중세 이래의 도기 자기 기와 조각 등이 눈에 띄어 오랫동안 성 구실을 한 것으로 헤아려진다.

동쪽의 동외동 당산(堂山) 구릉에는 유명한 조개더미(패총) 유적과 그에 딸린 쇠부리터(야철지)가 있다. 쇠부리터는 가야시대 고자국(古自國)의 성장 동력이 엿보이는 자료이며, 외래 유물이 많이 출토된 것도 특기할 만하다. 한(漢) 계통의 동경(銅鏡)과 인문도(印文陶), 왜계(倭系)인 광봉동모(廣鋒銅矛)와 야요이(彌生)식 토기 등이 출토돼, 당시 활발한 대외관계를 기반으로 삼은 고자국의 역동성을 느끼게 한다. 이 고갯길을 지나면 고성읍성이 있던 성내리다. 성내 삼거리에서 서쪽이 옛 치소가 있던 곳이고, 송도역으로 이르는 길은 북쪽으로 향한다.

고성 송학동 고분군은 가야시대 고자국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으며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최헌섭

송도역에 이르는 노정에는 길가에서 거대한 송학동 고분군과 맞닥뜨리게 된다. 서쪽 무기산(舞妓山) 구릉 무덤들과 한 무리를 이룬다. 이 고분군은 고자국 지배층 묘역으로 알려져 있다. 켜켜이 흙으로 쌓은 분구(墳丘)에 무덤방을 두었고, 이런 구조와 부장품에서 왜(倭) 등 주변국과 대외교류가 활발했음이 밝혀졌다. 만들어진 때는 늦은 가야 시대인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 무렵으로 헤아리고 있다.

송도역은 읍치의 동북쪽인 송학리 송학마을에 있었다. <동국여지승람> 고성현 역원에는 현의 북쪽 2리에 있다 했다. <광복이전조사유적유물미공개도면 Ⅰ -경상남도->에 실린 고성군 지형도에는 고성여중·고 남동쪽 삼거리에 송도역이 그려져 있고, 마을 이름을 송도동(松道洞)이라 적었다.

◇송도역(松道驛) = 고려시대 산남도의 속역인 망린역(望隣驛)이 전신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동여지도>에는 고성현 동쪽에 있다. 고려시대에는 남동쪽의 춘원역(春元驛)을 중계하였고, 조선시대 역도가 개편되면서 남서쪽 구허역(丘墟驛)을 연결하였다. 이렇듯 송도역이 있던 송도동 일원은 고려~조선시대 역도가 개편될 때도 양 역을 중계하는 결절지대(結節地帶)였으므로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정조 때인 1789년 간행한 <호구총수>에는 송도리(松道里)로 나온다. 딸린 역마와 인원에 대해서는 <여지도서> 경상도 고성현 역원에 기마(騎馬) 다섯 필, 복마(卜馬 : 짐 싣는 말) 여섯 필, 역리(驛吏) 25인, 사내 종 세 명, 계집 종 한 구(口 : 당시 계집 종은 이리 세었다)라 적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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