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1) 임진왜란 이후 개설된 옛 간선도로

오늘 경남도민일보 창간 12주년에 부쳐 지난 11주년에 약속했던 통영로(統營路) 옛길 복원을 위한 대장정을 설레는 마음으로 보고한다.

통영로는 임진왜란 이후 해방(海防)의 중요성을 깨달은 조선 정부가 당시의 수도인 한양에서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통영까지 이르는 길을 열고, 그 길을 일컫던 이름이다. 이번 통영로 답사는 통영의 통제영을 출발하여 경북 문경 유곡역에서 동래로(東萊路: 속칭 영남대로)와 만나 문경 새재(조령: 鳥嶺)를 넘어 서울로 이른다.

다른 길로는 통영별로(統營別路)가 있는데, 한양에서 전남 해남으로 이르는 삼남대로(三南大路)를 따라 내려오다가, 전북 전주 삼례역에서 분기하여 임실 남원 운봉과 함양 산청 진주 고성을 거쳐 통영에 이른다. 통영로와 통영별로는 조선시대 있었던 서울을 기점으로 삼은 10대 간선도로 가운데 현재 경남에 종점을 둔 하나뿐인 도로다.

오늘 처음 내딛는 걸음은 통영로와 통영별로 옛길을 옛글과 지도를 통해 복원하고, 그것을 되짚어 걸으며 되살리는 데 목적이 있다. 아무튼 독자 여러분께서도 이 작업을 시작한 우리 걸음이들을 응원해 주시고 지면을 통해 동행해 주실 것을 부탁드린다. 오늘 시작하는 통영로 지상 복원 장정은 한 주 걸러 한 차례씩 격주로 서울에 닿을 때까지 이어진다.

복원 첫째 날 경로

통제영 북문 밖 열무정 터

통제영 북문을 나선 길은 미월고개 아래의 한정골에 있던 열무정(閱武亭) 터에서 북서쪽으로 길을 잡아 원문고개로 오른다. 갈림길에 있었던 열무정은 지금의 장대마을에 있었는데, 효종 7년(1665) 40대 통제사 유혁연이 한정골 기슭에 세운 것이다. 그 앞뜰에서 군사를 훈련시키고 해마다 두 번씩 한산무과를 보였다고 한다. 그 뒤 헐린 것을 정조 9년(1785)에 다시 세웠으나 1900년 무렵 무너져 지금은 없어졌다. <여지도서> 통제영 공해에 열무정은 동문 밖에 있는 시사(試射)하는 곳이라 했다.

이곳 열무정 옛터에서 원문고개로 이르는 길가에는 여러 곳에 빗돌이 세워져 있어 옛길을 헤아리는 잣대 구실을 하고 있다. 바로 옛길은 지금의 국도보다는 낮은 산자락을 따라 열렸다. 옛길이 북신동 쪽으로 열리지 않은 것은 지금은 육지지만 당시에는 그곳이 내만(內灣)을 이루는 바다였기 때문이다.

원문고개

원문고개 아래 원항마을에는 1841년에 세운 통제사 서유대(徐有大)를 기리는 마애비가 있다. 마을 이름이 된 원항(轅項)은 원문고개의 다른 표현으로 원(轅)은 원문을, 항(項)은 고개의 다른 말인 목을 나타내기 위해 한자의 뜻을 빌려 적은 것이다. 마을의 이름은 그 고개에 있던 원문에서 비롯한 것이다.

원문고개는 이곳에 통제영으로의 출입을 통제하는 원문이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 즉, 원문(轅門)은 군영으로 드는 문을 이르는 것으로 지금의 검문소와 비슷한 기능을 했다. 옛 기록에 "군의 북쪽 10리에 있다. 숙종 8년(1682)에 통제사 원상(元相)이 쌓았다. 문에는 이층의 누각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고 나온다. 원상은 161대 통제사이고, 문루의 이름은 공진루(拱辰樓)라 했다.

영조 18년(1742)에 송징래(宋徵來) 통제사가 원문의 좌우로 성가퀴(성벽에서 위로 튀어나온 부분) 각 10첩(堞:성가퀴를 뜻하는 한자인데 성가퀴를 헤아리는 단위로 쓰임)을 쌓았으며, 정조 9년(1785)에는 이방일(李邦一) 통제사가 증축하고 원문창(轅門倉)을 세웠다. 성은 고개의 양쪽에 날개처럼 쌓은 것으로 관문성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구축 방식을 따르고 있다. 송징래는 <영조실록> 53권, 17년(1741) 2월 1일 기사에 "송징래를 통제사로 삼다"고 했으니 통제사로 부임한 그 이듬해에 성가퀴를 쌓았음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에 나오는 통제영

이 마을을 지나면 향교가 있는 죽림(竹林) 마을인데, 그 이름은 죽림부곡(部曲:특수 장인 집단의 거주지)에서 비롯했다. <동국여지승람> 고성현 고적에 "죽림부곡이 현 동쪽 40리에 있다"고 나온다. 뒤에 죽림수(戍:요즘으로 치면 방어 초소)를 두어 수자리(보초)를 세웠다. 이곳 죽림리에는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가 군집해 있고, 옛 질그릇 조각이 곳곳에 흩어져 있어 마을의 유래가 예사롭지 않음을 일러 준다.

옛길은 향교 앞으로 열렸는데, 통영향교는 1900년에 진남군이 고성현에서 분리되면서 세워졌다. 향교 앞에는 하마비와 1903년에 세운 관찰사 이재현(李載現)의 불망비가 있다.

죽림에서 양촌마을을 지나 구앳재를 넘는 길이 옛길이다. 이곳으로 길이 열린 까닭은 지금 나 있는 도로(국도 14호선)가 당시에는 질퍽거리는 간석지(干潟地)였기 때문이다. 고개를 넘어서면 효부 배씨의 빗돌을 봉안하고 있는 빗집등을 지나 고개 아래의 주막촌을 지나 구허역이 있던 노산리 본촌마을에 든다. 이곳 노산리 본촌마을에는 '큰돌'이라 불리던 많은 수의 지석묘가 있었으나 경지 정리로 모두 유실되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필자 약력>최헌섭(崔憲燮)△1963년 창원시 동읍 용전리 출생△창원대학교 사학과 졸업△경남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 과정 졸업△영남대학교 대학원 한국학과 박사 과정 수료△국립 창원문화재연구소(현 국립 가야문화재연구소) 연구원△재단법인 경남문화재연구원 조사과장△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센터장△현재 재단법인 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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