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말고도 살고 있네요] 작약꽃 이야기

옛 친정집 마당가에는 작약꽃 몇 그루가 있었는데, 봄이 오는 속도를 가늠해주는 바로미터였습니다. 언 땅이 포슬해지면 들고나는 길에 쪼그리고 앉아 땅의 온도를 재곤 했는데요. 땅이 녹고 볼을 갖다대면 끼쳐오던 흙내음에 훈기가 느껴지면 언제쯤이면 치마를 입어도 되겠구나, 상상하며 가슴이 설레곤 했습니다.

쑥 소쿠리를 챙기고 묵어서 녹슨 나물칼을 빛나게 갈아놓고는 작약꽃 순이 언제쯤 올라오려나 기다립니다. 소풍 날짜 받아놓고 하늘을 보듯 화단을 들여다보며 봄을 기다립니다. 지난가을 받아둔 꽃씨랑 사랑방 윗목에 갈무리해둔 달리아 뿌리도 점검합니다. 산골 겨울이 길었던 만큼 봄에 대한 갈망도 짙었습니다.

흐드러지게 핀 작약꽃. /뉴시스

간절한 만큼 더디게 오는 산골의 3월이 중순을 넘어서면 뾰족이 작약꽃 순이 진자색과 고동색의 오묘한 빛을 발산하며 솟아오릅니다. 마치 털 나기 전의 어린 새 날갯죽지와도 같은 새순이 올라오는 장면은 환희를 넘어서 경이로운 광경을 만듭니다. 김영랑은 '모란이 지고 나면 내 한 해는 다가고 말아'라 했지만 나의 한 해는 작약꽃 새순과 함께 시작됐다가 작약꽃이 함박 웃으며 유유히 꽃잎을 떨구면 다시 봄의 기다림이 시작되곤 했습니다. 처음 할아버지가 작약꽃 뿌리를 사다 심을 때는 약으로 쓰기 위해서였는데 꽃이 너무 예뻐 사립문 옆집에 들면 가장 먼저 보이는 자리에 심으셨습니다.

올해도 친정집 그 자리에는 작약꽃 새순이 올라오는데요. 옆에는 모란이 또 새순을 피워냅니다. 모란과 작약은 꽃이나 잎이 많이 닮아서 같은 꽃 아닌가 생각하지만 모란은 나무고 작약은 다년생 풀입니다. 연분홍 작약이 먼저 피어서 화려하게 지고 나면 이어서 붉디붉은 정열의 모란이 핍니다. 정원에 같이 심어두면 두 꽃이 릴레이로 피어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답니다.

꽃송이가 크고 환해 사람들 함박웃음과 같다 하여 함박꽃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줄기나 꽃의 모양에 따라 호작약·참작약·적작약·백작약 등이 있는데요. 작약은 꽃만 예쁜 것이 아니라 뿌리는 좋은 한약재로 애용된답니다. 특히 부인병(대하증·하리)·진경·두통·해열·지혈·진통·각혈·이뇨 등에 좋다고 합니다.

   
 

꽃말이 '부끄러움'인 작약꽃이 여성스럽다면 태양 아래 작열하듯 피는 모란꽃은 남성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꽃에는 전설이 있답니다. 옛날 한 나라의 공주가 사랑하는 왕자를 이웃나라 전쟁터에 보내놓고 애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거리의 눈먼 악사가 왕자가 죽어 모란이 되었다는 사연을 노래로 불렀습니다. 공주는 그 나라로 찾아가 모란꽃 옆에서 지성으로 기도한 끝에 작약꽃으로 화하여 모란꽃과 나란히 지내게 되었답니다.

작약이 수줍게 솟아올라 꽃봉오리를 앙증맞게 맺고 피어나는 모습을 옆에서 모란꽃이 그윽하게 바라보다 붉게 피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사랑이야기도 함께 감상하며 행복한 봄을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박덕선(경남환경교육문화센터 공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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