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에 살고 정에 우는 한국인의 삶

꿈속의 아내에게/하룻밤 새 진 꽃잎이 천 조각도 넘고/산비둘기 어미 제비는 집 위를 나는데/외로운 나그네는 돌아간다는 말 못하니/그 언제 그대와 함께 비단 금침 펴리오/그리워 말자 다신 그리워 말자/서글픈 꿈속에서 본 그리운 그 얼굴.

-전남 강진땅에서 유배중이던 다산 정약용이 쓴 '사부곡(思婦曲)'

정(情)이란 무엇일까요? 저자는 '한국인의 마음, 그 몹쓸 사랑'이라고 수식했지만, 정말 그 정이란 무엇일까요? 주변을 둘러보면 같은, 또는 비슷한 말로 우리 삶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 정입니다. 인정, 모정, 다정, 정나미, 인지상정, 미운정 고운정, 더러운 정, 얄미운 정. 여기다 '초코파이 정'도 있네요.

흔히 "갈수록 정이 메말라간다"고 한탄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은 인정(人情)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 언어생활에서도 '정'을 달고 살지요. 그놈의 정 때문이라느니, 인지상정이라느니, 정나미가 떨어진다느니, 인정머리가 없다느니 하는 말들은 무의식중에 튀어나올 정도로 익숙합니다. 그렇게 공기처럼 물처럼 익숙하다 보니 도대체 그놈의 정이 뭔지에 대해선 알아볼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 <정이란 무엇인가>는 단행본으로는 최초로 '정' 그 자체를 톺아본 시도일 것입니다.

   
 
일찍이 한국인의 정서를 탐구한 언론인 이규태는 "정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며 색깔도 없다. 냄새도 나지 않고 맛도 없다. 분명히 없는데, 있는 것이 정이다. 존재하되 역동적으로 존재한다. 그 없는 것에 손을 데고 그 없는 것에 오장육부가 녹고 그 없는 것에 살이 여윈다"고 했습니다.

저자는 "이 책을 만들면서 정을 시중에 물었더니 십중팔구는 '초코파이 정'이라고 대답하며 웃었다. 농담처럼 한 말이지만 그 '초코파이 정' 광고 시리즈를 고려하면 전혀 엉뚱한 대답도 아니다"라고 썼습니다.

이 책은 먼저 정의 복잡 다양한 양태와 속성을 살펴보고, 정에 살고 정에 울며 정을 노래해 온 한국인의 삶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정은 어디서 어떻게 생겨나는지, 정이 어떻게 '용서'라는 이름으로 승화되는지를 생생한 사례를 찾아 정이 주는 감동을 전하고 있습니다. 왜 갈수록 '비정'한 한국사회의 그늘이 깊어가는지도 되짚어 보았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는 정을 부부간의 정, 형제간의 정, 남녀간의 정, 친구간의 정, 사물을 사랑하는 물정(物情)으로 나누어 살펴보았습니다. 저자는 동서고금의 정에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 중 세계인의 심금을 울린 400년 전 '원이 엄마' 편지는 부부간의 정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성호 이익이 쓴 <우계전(友鷄傳)>이 보여주는 우애의 정은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하고, 영혼의 우애를 나눈 고흐 형제 이야기는 애절합니다. 친구간의 정에서는 '아름다운 벗' 퇴계와 고봉의 '망년지우(忘年之友)'가 시대를 초월해 오늘에 더욱 빛납니다. 정은 인정만이 아니라서 다룬 물정(物情)에서는 정이 인정을 넘어 어디까지 확장되고 숭고하게 승화되는지를 역사를 뒤져 생생하게 조명했습니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은 명문가 자제답지 않게 요즘 말로 '바람둥이'였다고 하는데요, 이런 말로 자기 합리화를 했다고 합니다.

"남녀간의 정욕(情慾)은 하늘이 준 것이며, 남녀 유별의 윤리는 성인(聖人)의 가르침이다. 성인은 하늘보다 한 등급 아래다. 성인을 따르느라 하늘을 어길 수는 없다."

이처럼 저자는 어디서 어떻게 모았는지 정에 대한 다양한 글을 절묘하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 글이 나온 배경이나 글을 쓴 이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굳이 '정이란 뭘까'를 질문하진 않습니다. 그러면서 책장을 술술 넘기다 보면 알게 모르게 정의 본질에 한 발짝씩 다가서게 됩니다. 더구나 성리학자로, 명현으로, 도덕군자로 알려졌던 조상 중에서 도저히 그런 글을 남겼을 것으로 짐작하기 어려운 이들의 솔직한 글을 발견하고 읽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이를테면 고려 문신으로 <동국이상국집>을 쓴 이규보의 시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한시 '절화행(折花行) 꽃을 꺾어 들고 지나며'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진주 이슬 머금은 모란꽃 한 송이를/새색시 꺾어 들고 창문 밖을 지나네/웃음 띤 얼굴로 신랑에게 묻기를/꽃이 예쁜가요 제 얼굴이 예쁜가요/짓궂은 신랑이 장난치기를/꽃이 더 예쁘구려!/꽃이 더 예쁘단 말에 토라진 새색시/꽃가지 밟아서 짓뭉개버리네/꽃이 저보다 좋으시다면/오늘밤은 꽃과 함께 주무시구려.

흥 하고 토라졌을 새색시, 그런 새색시를 더 사랑스레 보는 신랑의 모습이 선합니다. 일국의 재상을 지낸 이가 이처럼 적절한 질투를 동반한 사랑에 대해 시를 남겼다는 게 눈길을 한 번 더 끕니다.

저자 정운현은 중앙일보, 서울신문, 오마이뉴스 등 언론사 20여 년 근무 경력이 있는데다 그간 친일파 관련 자료 수집과 글쓰기에 전념해왔습니다. 요즘은 주로 집에서 인문학 분야의 책읽기와 글쓰기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밝혔는데요, 그의 폭넓은 독서와 그에 바탕 한 '다상량'의 폭과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생생한 사례 인용에 놀라게 됩니다.

여기에 한겨레 사진 기자를 시작으로 문화일보 사진부장인 김선규 씨의 생생한 흑백사진도 책에서 느끼는 감흥의 폭과 깊이를 더해주고 있네요. 책보세, 320쪽, 1만 6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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