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찬사, 그 새빨간 거짓말에 대하여

도내에는 '세계적인' 미술가가 많습니다. 일단 명단을 열거하자면 조각가 문신이 있고, 서울대에서 국내의 기라성 같은 제자를 숱하게 길렀던 조각가 김종영도 있습니다.

최근 세계적인 미술가가 또 탄생했습니다. 바로 재불 화가였던 고 이성자 작가입니다. 고인은 유작 375점을 진주시에 기증하면서 2014년까지 이성자 미술관 건립까지 약속받았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이 미술관 건립에 힘을 보태겠다며 시민모임까지 생겼습니다.

세계적인 작가가 많아진 경남은 미술가의 천국이 되었습니다. 세계적인 미술도시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는 못난이가 있을까요. 세계적인 작가는 많은데 세계적인 미술도시가 없는 것은 입과 손이 따로 놀기 때문입니다.

백남준 외에 국제적 미술관 등의 작가목록에 든 사람 있나

지역의 한 시장은 시립미술관 행사 축사에서 해당 작가를 두고 '피카소에 버금가는', '세계 5대 조각가'란 칭호를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무지도 이 정도면 망발에 가깝습니다. 그렇다고 미술관에 피카소에 버금가는 예산과 대우라도 했다면 진정성이라도 믿어줄 법도 한데 말입니다.

국내 작가 중 유일하게 '세계적'이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백남준 작가의 '프랙탈 거북선' 전시 모습. /뉴시스

오히려 전혁림 작가처럼 오방색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던 작가였던 만큼 '색채의 마술사'라든지, 백수(白壽)를 앞둔 고령에도 붓을 들고 후배에 귀감이 되어 '한국 화단의 거목'이란 표현은 명분이라도 있었던 것과 비교됩니다.

정말 이들이 세계적인 미술가일까요. 일단 '세계적인'이란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상식선에서 생각하면, 최소한 전 세계 미술인이 한번쯤은 들어봄직한 이름은 되어야겠습니다.

하다못해 전 세계 미술관 큐레이터나 화랑 관계자들의 개인 작가목록에는 들어가 있어야 '세계적'이란 단어를 붙여줄만 합니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한국인으로 '세계적인 작가'로 부를 수 있는 작가는 현재 백남준 밖에 없습니다.

이중섭도, 박수근도 세계적인 작가와는 거리가 한참 멀리 있습니다.

세계적이란 단어는 작품의 질만 높다고 쓸 수 있는 단어도 아니고 더욱이 작품가격이 높은 작가에게 붙이는 호칭은 더더욱 아닙니다. 따라서 퇴색한 예술의 도시 프랑스 파리에서 이름깨나 알려져 있다고 세계적인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응노, 김창열, 남관, 한묵과 같은 유명 재불 작가를 세계적인 작가라고 함부로 떠벌리지 않는 것은 '세계적'이란 단어의 무시무시함을 알기 때문이다.

일반인 무지 전제로 한 거품 수식…지역 미술계 경계해야

'세계적'이란 단어가 유독 미술계에서만 유행하는 이유는 다른 장르보다 일반인의 미술에 대한 무지를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이란 명칭의 남발은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 '미술가는 띄우기 나름'이라는 관념이 자리 잡아 생긴 병폐입니다. 이런 자위에 가까운 말의 유희는 스스로 논리적 오류에 갇히기 마련이지요.

더욱 문제는 지금까지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던 지역대학 미술교수들까지 분위기에 휩쓸려 지역적 병폐에 동참하는 기미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논문에서는 절대 등장할 수 없는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오면 립 서비스는 일반인에게 사실로 각인된다는 점에서 전문가 그룹의 언행은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언론사도 보도자료 속 함정에 일부러 빠져선 안 되겠지요.

예술가 사후 기념사업회 등이 생기면 항상 객관적인 시각은 사리지고 영웅화 작업에 목숨을 거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예술가를 사랑하는 민간단체의 자체행사라면 모를까 우상화 작업에 군민, 시민, 도민의 세금이 투입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앞으로 도내에 얼마나 많은 세계적인 미술가가 배출될지 사뭇 궁금해집니다.

말에 거품이 생기면 거품 위에 또 다른 거품으로 덮어야 하는 유치한 사태가 생깁니다. 우리가 우물에 앉아 세계적인 예술가라고 부르면 더 세계적인 예술가가 등장하면 무어라 부를 것인가요. 슈퍼 울트라 초특급 미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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