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말고도 살고 있네요] 싸리나무 이야기

모처럼 섣달 추위가 누그러져 나지막한 야산 오솔길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억새 숲 사이사이로 마른 고사리대와 앙상하게 씨앗을 달고 선 쑥부쟁이, 삽주, 엉겅퀴, 질경이 꽃대 등등 모두 지난 가을의 영상을 담고 겨울을 견디고 있었습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겨울 오솔길 길섶에서 발걸음 멈추고 곳곳을 들여다보고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던 동행인은 산에 와서도 편히 둘만 놀 수 없다고 토라졌습니다. 바싹 말라 흔적이 가물가물한 풀대를 들여다보며 '얘는 지난봄에 어떤 꽃을 피웠을까?' 상상하는 일은 겨울산 산책의 또 다른 재미입니다.

올해는 너무 추워 월년초마저도 다 얼어붙어 푸른 기운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진달래 꽃눈도 꽁꽁 싸매고 웅크려서 봄이 오기는 할까? 싶습니다. 그래도 햇볕을 등지고 앉아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마다 이름을 불러주며, 봄길을 상상하며 걷노라니 온갖 시름을 다 잊을 듯 생기가 솟아 가슴이 더워옵니다.

   
 
기슭 양지쪽 싸리나무 숲에는 새떼가 부지런히 드나듭니다. 메마른 가지 끝에 달린 싸리씨앗을 따먹는 중인가 봅니다. 한 알 따 입에 넣고 씹으니 아릿한 냄새와 전분 맛이 텁텁한 껍질 맛과 어우러져 입안 한 가득 찼습니다. 옛날 같으면 불쏘시개와 마당비·사립문 울타리·광주리·거름소쿠리감으로 제일 먼저 잘려나갔을 싸릿대입니다. 조직이 단단하고 탄력이 있으며 잘 썩지 않아 생활용품 만드는 재료로 많이 애용되어 왔습니다.

콩과의 싸리나무는 참싸리·물싸리·조록싸리·광대싸리·해변싸리·전동싸리·땅비싸리 등등 많은 종이 자라는데요. 그 중에서 우리 산야에 가장 많은 종이 참싸리입니다. 참싸리는 한여름 시작해 가을까지 보랏빛 꽃이 무리지어 피어나는데요. 향이 뛰어나고 꽃가루가 많아 벌을 많이 불러들이는 밀원식물입니다.

뿐만 아니라 열매는 가난하던 시절 구황식물로도 인기가 좋았는데요. 손톱만한 열매를 훑어 밀가루처럼 빻아 떡도 해먹고 죽도 끓여먹었다 합니다. 이처럼 쓰임새 많은 싸리나무는 약으로도 요긴하게 쓰였다는데요. 몸을 무쇠처럼 단단하게 하고 두통을 멈추고, 피부를 곱게 한다는 재주 많은 나무입니다.

뿌리는 보약이나 다름없어 닭백숙에 넣으면 황기나 인삼만큼 효능이 좋을 뿐 아니라 타박상·대하증·종기·류머티스성 관절염·요통 등에 달여 마시면 좋다고 합니다. 또 줄기는 달여 마시면 신장질환에 좋은 효험을 보여 소변을 잘 나오게 하고 부기를 뺀다고 합니다. 또 꽃은 따서 소주에 담가 액을 피부에 바르면 기미·주근깨를 없애고 살결을 곱게 한다 하고, 싸리 달인 물로 목욕하면 땀을 잘 나게 하고 피부 속 노폐물을 빼낸다고 합니다. 비타민C가 풍부한 잎은 초봄에 채취해 덖어 차로 만들어 먹으면 몸을 따뜻하게 하고 피부를 맑게 해준답니다.

   
 
다 열거하기 어려울만큼 요긴하게 쓰이는 싸리나무는 이제 무성한 숲을 이루며 천지로 널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도시에서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더 이상 싸리나무를 찾지 않습니다. 구제역 창궐로 고향 찾기도 미안한 이 삭막한 겨울에 싸리나무 사립문 열고 아궁이불 정겹게 피어 오르던 옛 고향의 설날이 그립습니다. 구제역 파동의 원인이 가축에게 동물권을 빼앗고, 생명을 돈으로만 보는 인간의 욕심 때문에 일어난 문제라는 진단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 깊습니다. 옛날처럼 가축도 가족으로 여기며 생명공동체를 이루던 자연친화적 삶으로의 회귀가 재앙의 해법은 아닐지 반성해 볼 때입니다.

/박덕선(경남환경교육문화센터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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