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예술 작품은 직조물로 비유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직조물을 만져보고 뒤집어보고 하는 것이 '이미지 읽기'이다. 이 이미지 읽기는 무엇인가를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하는 것인데 화면에서는 읽을거리가 사라져 버렸으니 이미지 읽기는 단절의 시대를 맞았다.

한때 그림은 문자를 대신했을 만큼 쉽게 전달되는 언어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 그림은 점점 기호와 암호가 되어 갔고, 그림에서 구체적인 모습들이 사라졌다.

현대미술은 사람들이 원하는 '무엇'에 관한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대신 '어떻게' 그리는가에 관한 것만 보여주려 했다. 사람들은 구체적인 사물의 모습을 통해서 그림과 소통하기를 원했지만, 구체적인 형상은 화면에서 추방되었고, 화면에서 이미지가 사라짐으로 해서 사람들은 화면에서 소외되어 갔고 결국 소통은 단절되었다. 이것이 사람들의 관심에서 밀려난 현대미술의 단면이다. 고흐나 고갱은 사실적인 그림 속에 감정을 첨가했다. 마티스는 그림에서 형태와 색채를 분리했고 칸딘스키는 형태를 해체했다. 이렇게 변화된 그림에서는 내용을 알아내기 쉽지 않다.

그때 그림은 형태를 통한 내용의 전달이 아니라 표현방법에 있고 이때 미술가들은 새로운 미술의 세계를 보여주려 했다. 형태를 원통으로 분석한 세잔, 원통을 입체로 분석한 피카소, 입체를 면으로 분석한 몬드리안, 그리고 그리기를 포기한 잭슨 폴록까지 현대예술은 새로운 장르와 매체를 개척하며 스스로 진화해 왔다. 매체의 물리적 한계와 고정관념이라는 정신적 한계는 예술의 진화의 환경적 요인이 되었으며, 이것은 예술의 창작자인 예술가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물론 예술의 진화는 수용자인 관객에게도 요구되었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썼던 아놀드 하우저(Arnold hauser)는 고급문화가 창작자 중심이고 대중문화는 수용자 중심이라고 평가한 바가 있다. 그리고 예술은 '예술가의 독백이 아니라 말의 주고받음'이며 '예술가의 작업은 관객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완성된다'고 했다. 즉 수용자의 소비가 생산자의 예술을 결정한다는 것이며 만약 수용자가 없으면 예술도 없기 때문에 누군가 봐줘야 비로소 예술이 된다는 것이다.

   
 
표준색을 바르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고 한 작가가 있었고, 완성된 상태가 아닌 작업을 전시장에 늘어놓은 작가도 있었다. 예술에 대해서 '생산자·수용자' 관점에서만 볼 수는 없지만 아놀드 하우저의 책을 새해에는 다시 읽을 작정이다.

/황무현(마산대학 아동미술교육과 교수)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