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잎 끝에 매달린 진홍색 가을

상사화(相思花)라고, 잎이 져야 꽃이 피고 꽃이 져야 잎이 피는 풀이 있다. 우리말로는 꽃무릇이라 하는 이 꽃은 5월에 잎이 지고 9~10월에 꽃이 펴서 꽃과 잎이 서로 그리워만 하지 끝내 만나지는 못한다. 선운사 골짜기에 무리를 이루어 사는 이 상사화는, 아쉽게도 지금 가보면 짧은 줄기만 남아 있다.
그렇다고 봄철도 아니어서 그 유명한 동백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장 북쪽에 있는 동백 군락으로, 남쪽 거제와 여수에서 이미 져버린 동백꽃이 선운사로 옮겨와 4월이나 5월에 빨갛게 피지만 지금은 대웅전 뒤뜰 너머에 짙은 초록으로 빛나고 있을 뿐이다.
지난 봄철에는 그 앞에 핏빛 꽃송이들이 뚜욱 뚝, 차라리 화려하게 지기도 했겠지만 지금은 “꽃도 없는데 뭐 하러 찍어!” 하는 여인네들의 웃음 띤 핀잔에 아마도 자리를 옮겨 앉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고 단풍이 한창인 것도 아니다. 일요일,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면서 찾은 선운사. 군데군데 노랗고 빨갛게 조금씩 물이 들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무어라 꼬집어 이르기 힘든 묘한 분위기로 절집 구석구석 이미 깊숙이 들어와 있는 가을 빛깔을 느낄 수 있었다.
문을 지나면 마주서 있는 만세루, 대웅전을 짓고 남은 목재로 ‘제멋대로’ 지은 이 만세루 앞에는 감나무들이 서 있다. 잎은 다 지고 빨간 감들만 주저리주저리 풍성하게 매단 채 있다. 지난 여름을 붉게 달궜을 배롱나무들도 마당과 축대에서 잎을 떨구어 여위고 비틀린 몸매를 그대로 내보이고 있다.
전라도 절집은 정갈한 살림집을 닮았다. 우람하고 위엄 드높은 가람이 없는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 새로 만들었든 옛날부터 내려오는 것이든 돌탑이 엄청 높지 않은 것도 그런 느낌을 갖는 데 한 몫 거드는지도 모르겠다.
선운사 마당을 한 바퀴 돌아본 다음에는 위로 난 길을 따라 도솔암까지 갈 일이다. 길이 넓긴 하지만, 단풍 드는 이 길을 자동차로 가는 얼간이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절집에서 내를 건너지 않고 이어지는 오솔길 1km는 채 단풍이 무르익지 않았는데도 그윽하기만 하다.
이른바 한창 때는 울긋불긋 단풍물이 들어 옷만 벗어 쥐어짜도 빨간 물이 뚝뚝 떨어진다는 길이다. 길 가운데쯤에는 동자승 같기도 하고 작은 산신할멈 같기도 한 키 작고 복스런 장승이 하나 길손을 맞이한다.
선운산과 선운사는 거기에 그렇게 있었다. 고개를 들면 전후좌우로 단풍으로 막 옷을 갈아입으며 옹기종기 드러난 바위들을 품고 앉아 있는 산들. 단풍길을 따라 올라 도솔암에 이르면 시야가 조금씩 트이기 시작한다.
전세 버스를 타고 와 마음이 바쁜 이들은 여기 대청마루에 앉았다가 그냥 내려가는 어리석음을 저지른다. 하지만 눈길을 이리저리 돌려보면 무언가 숨어 있을 법한 구석이 보인다. 위쪽에 칠송대와 내원궁이 자리잡고 사람들의 발품 팔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가볼만한 곳

칠송대에는 엄청 큰 마애석불이 앉아 있다. 고려시대 호족이 만든 불상은 네모난 채 질감이 없어 부피는 느껴지지 않는다. ‘일자로 도드라진 입과 함께 얼굴에는 파격적인 미소를 담고 있다’고 하나 밑에서 보면 두 눈이 쭉 찢어졌고 입이 튀어나와 심술궂은 모습이다.
부처가 이름나게 된 것은 동학 덕분이다. 1894년 8월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기 2년 전에, 당시 접주이던 손화중의 손아래사람들이 부처 배꼽을 파낸 것이다. 배꼽에 세상을 살릴 비결(秘訣)이 들어 있다는 전설이 내려왔기 때문이다. 단지 배꼽을 여는 사람에게는 벼락살(煞)이 내린다 해서 감히 열어보지는 못한 상태였다.
동학교도들은 스님들을 묶은 다음 배꼽을 뜯었다. 살기 고단하던 시절, 푸른 대와 수백 길 새끼를 장만해 바위에 매달린 채로 모두 함께 잘사는 대동세상을 빌고 빌며 정질을 해댔을 것이다. 하지만 비결은 없었으며 간여했던 교도들은 목이 날아가거나 혹독한 곤장맛을 봐야 했다. 지금에 와서는 이태 뒤 동학농민전쟁이 터졌으니 폭정에 시달리던 민중의 염원이 바로 비결이 아니었을까 짐작만 해볼 뿐이다.
칠송대 바로 옆에 내원궁이 있다. 가파른 계단을 까치발로 올라가면 5분이 채 안 걸리지만 예까지 오느라 지친 여인네들은 고만 발걸음을 돌리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 모셔놓은 부처님은 당신이 갖고 있는 여러 소원 가운데 하나는 들어주는 영험이 있다 하니, 여럿이 뜻 맞춰 올라가 동학 농민들이 꿈꿨던 해방세상을 빌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내원궁에 올라보는 참 맛은 사방으로 탁 트인 전망에 있다. 선운산(336m)은 ‘호남의 내금강’이라 이를 만큼 계곡이 아름답다. 등성이를 따라 이어지는 개이빨산(345m)과 청룡산(314m) 등이 삐죽 솟은 바위를 안고 단풍을 둘러치고 감싸안 듯 달려온다.
선운사에 안겨 있는 또다른 명품 한 가지는 추사 김정희가 써 남긴 비석이다.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가 그것인데 까만 남포 오석에 새겨져서 매표소 지나자마자 나오는 오른쪽 부도 무리 속에 자리잡고 있다.
뒷면에는 백파를 일러 왜 ‘율사’라 하고 ‘대기대용’이라 하는지를 밝혀 써놓았는데, 마지막 한 줄과 덧붙인 글들은 추사 글씨가 아니라고 한다. 서도에 눈에 없는 사람도 들여다보면 획이나 삐침이 엉성해 필력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서도를 아는 사람들은 탁본으로 걸어두기도 하고 소중한 손님에게 선물로 주기도 한다는 추사 만년의 명작이다.

▶찾아가는 길

고창 선운사는 전라북도 서남쪽 끝 바닷가에 있다. 때문에 대중교통편을 이용하려면 상당한 불편을 감수해야 하겠다. 굳이 버스를 타고 가려면 같은 전북이긴 하지만 전주보다는 광주를 거쳐가는 게 낫다.
자가용으로 갈 때는 진주나 마산에서 남해고속도로를 따라 끝까지 간 다음 광주에서 호남고속도로로 바꿔 타야 한다. 태인 나들목에서 빠져 나와 부안을 거쳐 고창으로 들어간다.
들어가는 길목에는 부안에서 내소사를 거칠 수도 있다. 또 지난해 가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고인돌 무리를 고창읍내에서 만나볼 수도 있겠다. 시간은 3시 30분쯤 걸린다.
아무래도 가을단풍을 보러갈 때는 여행사나 백화점 문화센터서 마련하는 테마여행에 몸을 맡기는 게 좋다. 낯모르는 사람과 옷을 부비며 새로 사귀어 보는 맛도 느낄 수 있고 이것저것 신경쓸 필요 없이 몸만 나서면 되는 편리함도 누릴 수 있다. 차삯도 4만원 안팎으로 그리 비싸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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