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송이 작고 꽃대 연악한 키 작은 꽃11월 산행서 만나면 애잔한 감동 전해

쏜살같은 세월이라더니 빛살 같이 더 빠릅니다. 벌써 11월이 덜커덩이며 멀어져 갑니다. 포성에 떠는 연평도 소식이 마치 무서리에 얼어서도 꽃을 피운 물매화 같이 애가 탑니다. 어쩌자고 어쩌자고……. 애가 타서 가슴 치는 사람들의 한숨 소리가 하루 종일 지상을 뒤덮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슬아슬하게 넘어간 오늘 하루가 오늘로 끝이 나 주길 기도하며 밥숟가락을 들었을 것입니다. 어떤 잘못도 전쟁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일일 것입니다. 절대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 일어났습니다. 며칠간의 끔찍한 일들이 연극의 한 장면처럼 막을 내리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그런 것이면 좋겠습니다.

11월 황매산 등 고산지대에서 꽃을 피우는 물매화.

포성으로 얼룩진 땅덩어리에도 꽃은 피어나듯 새해가 시작되고 희망은 여기저기서 다시 새싹을 틔울 것입니다. 다가오는 해에는 지구촌 하늘아래 화해와 평화의 깃발이 촛불처럼 나부끼면 좋겠습니다. 산등성이 수풀 새에 떨고 선 들꽃 줄기 같은 질긴 생명의 아이들이 더 이상 눈물 흘리지 않는 한 해이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버림을 견디는 아이처럼 생명이 질긴 풀꽃 얘기 하나 할까 합니다. 푸르던 풀새들 모두 메말라 갈빛으로 흔들리는 황매산이나 화왕산 같은 높은 산을 오르다보면 정상 부근 물기 축축한 길섶에서 옹기종기 모여 피어 있는 상앗빛 물매화를 볼 수 있습니다.

9월에서부터 피어나는 꽃이지만 양지쪽엔 서리 내리는 11월에도 만날 수 있지요. 주로 고산지대에 피어서 야산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이 물매화는 꽃송이가 작고 꽃대가 연약해서 언뜻 보아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 키 작은 꽃이랍니다.

그러니까 다 자라도 30cm 안팎에 머물 뿐인데 보통 하얗게 피는 꽃잎과 꽃받침 조각은 매화꽃과 마찬가지로 5개씩인데 대신 나무는 아니고 여러해살이풀이랍니다. 양지쪽 물가에 송이송이 모여 피기도 하는데 가을산을 오르다 해질 녘에 피어 있는 꽃무리를 만나면 경이롭다 못해 감동적이랍니다. 꼭 상아로 깎은 촛대모양을 한 다섯 잎의 꽃잎과 수술은 그 매혹적인 모양이 매화꽃을 닮았다 해서 물매화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여리디여린 꽃송이가 모여 스산한 노을빛을 받고 있는 모습을 마주하면 그 애잔함에 눈물이 맺힐 정도랍니다. 꽃술은 가득 꽃가루를 품고 있어 벌들이 자주 찾는 밀원(蜜源) 식물이지만 약용으로 쓴 흔적은 없답니다.

지난 늦은 가을 황매산을 오르다 만난 꽃무리 앞에 하염없이 앉아 함께 떨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작고 여린 것들이 견디어내야 할 고통들이 왜 그리 쓰리던지요. 또 큰 깨달음 하나 얻고 발길을 돌렸었습니다.

   
 

그것들이 모여 이뤄낸 세상을 포클레인으로 할퀴듯 휘젓는 큰 발들 속에 있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었지요. 석양빛을 머금고 촛불처럼 피어 흔들리는 물매화 몇 송이 속에서 살얼음판 위의 연평도가 겹쳐서 간절한 기도가 나옵니다. 절절한 마음으로 평화의 촛불을 켜들고 있는 꽃 한 송이에 담긴 평화의 의미가 만사람의 마음에 전달되기를 기원해봅니다.

/박덕선(경남환경교육문화센터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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