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서울 광화문 광장을 42년간 지켜온 이순신 장군 동상이 녹이 슬고 부식된 곳을 보수하기 위해서 입원했다. 40일쯤 후에 퇴원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예정이라 한다.

그리고 이틀 전 12일에는 8억 원을 들여 창원광장 주변 경남도청 앞 큰길에 말을 타고 활 쏘는 모습의 '정렬공 최윤덕 장상' 동상이 세워졌다.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소설에서 이청준은 동상이 발언하는 시대는 그 자체로 억압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동상은 왜 만들어지는 것일까?

런던의 트라팔 가 광장에는 넬슨 기념동상이 있고,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워싱턴 장군의 워싱턴 기념탑이 있다. 중국에도 마오쩌둥 주석을 비롯한 많은 동상이 있고, 북한소식을 전하는 TV에서는 김일성 주석의 석상을 자주 비춰준다.

볼리비아 정글에서 체 게바라와 함께 지냈던 프랑스 작가 레지스 드브레는 사람이 죽으면 사라진 신체를 대신하는 물질, 그것이 바로 미술의 시작이라고 했다. 그래서 부재(不在)는 상징적 물질로 보충되는데, 그때 죽은 왕을 대신하는 마스크라든지 동상은 부재를 메우는 물질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서 죽은 이에 대한 경의 표현방식을 시대별로 설명하면서 르네상스 이전 전근대 봉건왕정에는 누워있는 와상이 주를 이루었고, 절대왕정시기인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후반에는 승마상이 트렌드였다고 한다. 그리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공화정이 들어서면서는 입상의 시대가 왔고 21세기 전후해서는 포스터의 시대가 왔다고 분류했다.

기념조형물은 라틴어인 'monumentum'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추억, 기억을 상기시키는 모든 것을 의미하며 사회적 가치와 공익성 그리고 시대의 흐름을 담보해내는 활동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 기념조형물은 1968년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된 이순신 장군 동상 설치를 시점으로 본격화되었고 2000년대에는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공공미술지원 프로젝트로 그 영역이 확장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함안군 나들목에는 몇 년 전 세워진 이방실 장군의 승마상이 있고, 의령군 홍의장군, 진주시 김시민 장군의 동상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10년 최윤덕 장상 승마상이 창원시에 세워졌다.

그런데 공공장소를 독점하고 있는 기념조형물들이 인본주의적인 우리사회 가치를 담보해줄 수는 없는 것일까. 최소한 기념조형물이 왜 그 장소에 있어야 하고 그것이 무엇을 말하며 그 작품이 설치된 공간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물음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이들에게는 좀 불온한 주장으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관 주도로 진행되는 공공조형물 설치사업에서 여전히 우리는 군주와 군주를 대신하는 군국주의 영웅을 표상하는 데 치중하는 느낌이다. 21세기 미래지향적인 가치와 공동체 공동의 관심이나 이익, 즉 공익(public interest)을 찾기 위해서는 기념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도 필요할 것 같다.

/황무현(마산대학 아동미술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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