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의하면, 내게 있어 전깃불의 발견은 초등학교 5학년 마산으로 전학을 오는 날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강남극장 앞의 불야성 같은 상설시장이었는데 지금도 문화적 충격 탓인지 그날의 풍광을 기억하고 있다. 내게 문명은 그렇게 왔다. 불에 대한 접근이 나에겐 문명의 시작인 셈이다.

그리고 내게는 불에 관한 트라우마가 있다. 상처가 있었고 정신적 외상인 충격도 함께 남겼다. 불 때문에 어린 시절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당했기에 지금도 불만 보면 빨려 들어가는 느낌과 더불어 손이 불로 간다.

프로스트가 "기억은…비존재의 심연으로부터 나를 끌어올리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줄과도 같다"고 했던가.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가져다준 대가로 전생의 기억을 가져갔듯이 내게는 트라우마와 더불어 밤의 시간을 주고 갔다.

밤의 시간은 정적이다. 그래서 집중감이 있고 생각이 많아진다. 생각의 대부분은 기억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이 많아지고 유년의 기억을 심층에서 끄집어 낼 때, 그 기억은 언제나 현실과 갈등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혹은 기억이 현실로 소환되거나 이른 바 현실로 '재현'(representation)될 때마다, 기억하고 있던 유년의 세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기억하기' 자체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세계와 무관할뿐더러 언제나 '갈등'하는 장소에 놓이기도 한다.

마산은 거리나 동네로 기억되었다. 불종거리, 창동, 오동동, 합성동, 신마산 댓거리까지.

어떤 기억이라도 기억은 왜곡을 동반한다. 지나간 기억과 현재에 대한 기억이 여러 단상으로 축적되어 여러 형태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마산을 근거지로 살아오면서 마산의 변화를 보고 있다.

기억 속의 풍경은 고정되어 있지만 실제는 항시 움직이며 변한다. 그러기에 그에 대한 감정도 지극히 가변적이다.

기억속의 불야성의 거리 마산은 이제 불이 꺼지고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모두 박스에서 분류되고 있다. 박스 속에는 사람위에 층층이 사람이 눕고 층층이 잠을 청한다. 밥을 먹고 운동을 하고, 물건을 사기위해서 건물로 들어간다. 사람들은 모두 건물 안에 있다.

마산은 이제 동네와 거리보다는 건물을 이야기한다. 지향해야할 도시의 가치와 삶의 성찰이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형마트나 백화점 같은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듯이 마산은 바코드 기호가 달린 분류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황무현(마산대학 아동미술교육과 교수)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