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건 조국에 대한 배신감뿐"

지난해 11월 20일 사이판 여행 첫 날 아침, 떠올리고 싶지 않은 순간이다. 그 후 8개월간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사이판 총기난사 피해자인 박재형씨와 아내 박명숙씨를 만났다.

서울에서 병원생활에 너무 지쳐 지난 4일 창원(옛 마산)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친정집에 맡긴 5살 딸과 3살 아들도 보고 싶고 점점 무기력해지는 것 같아 의사들 만류에도 일단은 벗어나고 싶었다는 부부. 병원비로 날린 집은 산 사람으로 살기를 포기한다는 서명을 하고 받은 보험금으로 다시 얻었다. 종신보험에서 받은 사망(에 준하는)보험금과 여행사에서 준 보험금으로 전셋집을 구했다.

박재형·박명숙 부부
서울대병원에서 노동력 100% 상실로 보험 관련 사망에 준하는 진단을 내렸음에도 하나투어에서 가입한 여행자 보험은 55%만 인정했다. 박명숙 씨가 여행사에 왜 그런 결과가 나오냐고 물었더니 간단하게 답변하더란다. "저희 약관에 의하면 그렇게 판단이 되고, 고객께서도 그런 저희 약관을 보고 가입하신 것이니 아무 문제가 없다"라고.

경남도민일보와 동맹블로거들의 꾸준한 보도와 문제제기로 외교통상부와 현지 정부에 대한 비난여론이 확산되자 지난 1월 사이판 정부는 마리아나 지역사회의 기금 모금을 장려해 보상금을 지급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 뒤로 어떤 소식도 없었다. 박명숙 씨는 꾸준히 외교부에 민원을 제기했다.

지난 6월 19일 답변이 왔다. "최근 사이판은 경제 사정 악화로 상수도 공급도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관광객 숫자도 급감하여…, 민간 모금 액수는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사이판 당국으로부터 모금 결과를 통보받는 대로 그 결과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책임을 회피하는 하나투어, 사이판 정부, 외교통상부의 태도에 부부는 몸도 마음도 지쳐가고 있었다. 박재형 씨는 인터뷰 내내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아내 박명숙 씨는 지난 5월부터 남편이 말수가 눈에 띄게 줄기도 했고, 질문을 하면 3분이 지나야 답을 할 수 있는 상황이란다. 4시간마다 진통제를 먹어도 허리 통증에 시달리는 박재형 씨는 하반신 마비에 대소변을 가릴 수 없는 1급 장애인이다. 사이판에서 어이없는 총탄을 맞기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사망(에 준하는)보험금을 받던 날의 심경은…." 기자도 차마 질문을 매듭짓지 못한 채 얼버무렸다. 박재형 씨는 말이 없고, 머뭇하던 박명숙 씨의 눈시울이 잠시 반짝인다. 괜히 물었다. "그 말은 우리도 서로가 조심했던, 아직 차마 말하지 못했던 부분이에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박재형 씨는 통증 때문에 잠시 누워야겠다며 자리를 떴다. 박명숙씨의 이야기로 옮겨진다. 8월 18일 남편이 서울대병원에 검사받으러 가는 날 박명숙 씨도 신경정신과에 예약이 되어 있었다. 갑자기 몸에 힘이 빠지고 머리가 휑해지는 느낌과 함께 숨 쉬는 게 힘들어 서울대병원 응급실에 간 적이 있다. '이게 끝이구나. 이렇게 죽는구나' 그 생각만 맴돌았다고 한다. 병원에선 공황장애와 우울증이라고 진단했다.

당장 2~3주 입원하라는 의사 권유에도 약만 처방 받았다. 자신이 없으면 안 되는 남편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 생기던 증상이 일상생활에서 나타나고 기간이 점점 짧아지다보니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줄어들고 있단다.

"이 사건이 남편만 아프게 한 게 아니라, 아이들과 부모님에게까지 모든 가족이 피해를 보고 있다 생각하니 가만히 있다가도 치가 떨려요. 이대로는 너무 억울해서 지더라도 소송을 걸고 싶어요."

하지만 이내 또 정부와 공룡 기업과 맞서 길고 힘든 싸움 끝에 같은 상처가 더 깊게 팰까 혼란스러워 했다.

아빠 휠체어에 올라타고 다리에 매달리며 장난치는 모습에 아직 어린 아이들은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제는 딸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길에서 어떤 사람이 '빵' 해서 아빠 다리가 없어졌어" 이러더란다. 나중에 아이들이 커갈 때 이 사건을, 우리 조국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은 깊어 간다.

자국민도 보호하지 못하는 정부는, 미디어 노출에 대해 되레 협박하고 있는 여행사는, 이들의 고통을 지켜만 보고 있는 우리는 과연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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