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1833~1906)의 시신이 부산포로 돌아서 충청도 정산 선영으로 운구될 때 많은 백성들이 연도에 몰려 울부짖는 광경을 황현(黃炫)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은 잘 적고 있다.



1906년 11월21일 영구가 부산에 이르니 우리 상민들은 파시하고 통곡하되 친척이 죽은 것처럼 슬퍼하였다. 남녀노유가 모두 뱃전을 잡고 매달려 울면서 곡성이 넓은 바다를 진동시켰다.



상인들은 그 회사(상무사:상공회의소)에 호상소를 마련하고 상여를 꾸몄으며 하루를 머물러 있다가 출발하니 상여를 따라 펄펄 뛰며 우짖는 자가 수천 수만이었다. 산승(山僧)·방기(坊妓)·걸인 등속의 사람들까지 존광(尊筐)을 가지고와서 뒤섞여 저자를 이루었고 만장을 모아 몇필의 말에 실려서 왔으나 종일토록 10리를 지나지 못했으며 입으로 부음이 급속히 전해져서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 (중략) …



상여가 상주에 이르니 일본인은 괴로워하여 상여를 물리치고 기차에 싣고 순식간에 고향집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상주에 오기까지 300리 길을 10일간이나 허비한 것이다. 항간의 곡성은 온 나라안에 퍼졌고, 사대부로부터 길거리에서 뛰어노는 어린 아이, 달리는 군졸에 이르기까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상(弔喪)하며 “최면암이 죽었구나”하며 슬퍼하였다.



국초이래 죽어서 애통함이 이같이 이룬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홀로 조정에서만은 은전이 없었으니 적신(賊臣)들이 나라일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최익현이 죽기 수일전 밤에 서울 동쪽에서 큰 별이 보이더니 바다 가운데로 떨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음이 이르렀다. 영구가 동래항에 이르자, 갑자기 처량한 비가 내리더니 쌍무지개가 물가에서 일어났다. 장례를 치를 때 큰 비가 쏟아지더니 소상과 대상에 모두 고우(苦雨)가 온종일 쏟아져서 사람들은 더욱 이상하게 여기고 슬퍼하였다.



이렇듯 온 백성들이 그의 죽음을 비통하게 여긴 것은 구한말 애국지사의 우두머리로서 또한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킨 선봉장이었기 때문이다.



일제가 조선과의 통상조약을 맺기 위해 혈안이 되었을 때, 조약체결을 결사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는 상소문에서 일본과의 화친은 굴종이요, 고유의 우리 풍습이 붕괴된다고 단언했다. 또한 그는 상소문과 도끼를 들고 덕수궁·대한문 앞에서 엎드렸다.



조약을 체결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목을 치라는 뜻이었다. 그 후 강화도조약·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러나 관군과 싸움이 동족상잔임을 알고 의병을 해산하는 용단을 내리기도 하였다.



노구를 이끌고 나타난 최익현은 결국, 일본 헌병대의 군율위반죄로 대마도로 끌려가고 만다. 그는 관모를 벗지 않고 일본음식은 아예 입에 대지 않았다. 단식을 계속하다 끝내 대마도 위립관에서 순절하고 말았으니 그때 나이 74세였다. 그해 11월 21일 그의 상여가 부산에 도착, 초량·동래·구포장·김해를 경유하여 창원에 이르렀다. 남녀는 물론 창원향교에서는 수백명의 유림들이 춘추대의, 일월고충(日月高忠)의 조기를 들고 나와 통곡하였다. 창원기생들도 나와 오열을 터뜨리며 개중에는 억울함을 참지 못해 길길이 날뛰었다.



또한 10여명의 병사들은 마산항에서 길을 차단하고 향민들을 접근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협박하면서 상여를 강제로 기차에 싣고자 하였다. 종자(從者)들이 정색으로 거절하자 일본군도 도리없다는 듯 끝내 물러서는 광경이 벌어졌다. 그리고 영어가 가는 곳마다 사민(士民)이 무리지어 혹여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이고 있었다.



창녕읍에 당도하자 일본군 헌병소위 하리다(平田錢太郞)가 지휘하는 일단의 병사들이 사령관인 하세가와 대장의 명령이라면서 길을 막는 것이 아닌가. 이때 종자들이 반일시위대로 변해 팽팽히 맞서 그 기세를 제압하고 말았다.



이날 싸움은 10만 군대보다 강하여 왜적이 조선을 강제한지 30년만에 최초로 그들 뜻대로 하지못한 사건임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최익현, 그가 줄곧 내세운 대의정신만은 혼탁한 세상을 밝히는 등불임에 틀림없다. 나라가 위급할 때 원로가 취해야 할 도리가 무엇인가를 명명백백하게 보여준 사표임에 틀림없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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