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조리용어 중에 '채 친다'라는 표현이 있다. 여기에서 '채(菜)'는 나물요리를 말하고, 무나 오이 등 재료를 나물로 만들려고 가늘고 길게 써는 것을 두고 '채를 친다'고 쓴다.

채는 재료 가열 여부에 따라 생채(生菜), 냉채(冷菜), 숙채(熟菜)로 구별한다. 생채는 날것 그대로 채를 쳐서 양념한 것이며 냉채는 전복, 해삼, 닭고기 따위에 오이, 동아, 배추 따위 채소를 잘게 썰어 섞고 얼음을 넣어 차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숙채는 채 친 것을 삶아 양념한 것을 말한다.

한편, 재료 종류에 따라 소채(蔬菜), 어채(魚菜), 잡채(雜菜)로 나뉜다. 이중 잡채는 숙채의 일종으로 여러 가지 나물이 섞인다는 뜻이다. 오늘날 잡채는 일반 가정에서도 쉽게 만들어 먹는 별미이지만, 궁중에서 먹었던 귀한 음식이었다. 그렇다면, 잡채는 언제부터 먹었을까? <광해군일기>(1608~1623년)에는 잡채를 만들어 호조판서 자리까지 오른 인물인 이충을 빗댄 작자 미상의 시가 등장한다.

음식으로 광해군 환심 잡은 이충

'沙蔘閣老權初重(사삼각로권초중, 처음에는 사삼각로의 권세가 중하더니) 雜菜尙書勢莫當(잡채상서세막당, 지금은 잡채상서의 세력을 당할 자가 없구나)'.

여기서 사삼각로는 한효순(광해군 당시 이이첨과 함께 인목대비를 궁에 유폐시킨 장본인)을 일컫는 것이고, 잡채상서는 이충을 지칭하는 것으로 '처음에는 더덕으로 밀전병을 만들어 바친 한효순의 권력이 막강했는데, 지금은 임금에게 잡채를 만들어 바친 호조판서 이충의 권력을 당해낼 자가 없다'며 음식으로 권력을 취한 그를 조롱하는 내용이다.

당시 이충은 진기한 음식을 만들어 사사로이 왕에게 바치곤 했는데, '광해군은 식사 때마다 반드시 이충의 집에서 만들어 오는 음식을 기다렸다가 수저를 들곤 했다'고 전해진다. 이충은 갖가지 채소를 볶아 새로운 맛을 가미한 음식을 올렸는데 그 맛이 아주 좋아 임금의 환심을 사게 되었고 그 요리가 바로 잡채였던 것이다.

잡채 조리법에 대한 최초의 문헌은 1670년경에 발간된 <음식디미방>이다. 잡채는 정조대왕이 을묘년(1795년)에 현륭원에 행차한 내용을 정리한 <원행을묘정리의궤>에도 등장한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잡채 재료로는 당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당면이 들어간 잡채의 유래를 알려면, 우선 당면의 유래를 살펴봐야 한다. 우리나라 당면의 역사는 중국의 당면 기술을 배운 한 일본인이 1912년 평양에 소규모 당면공장을 열고 당면을 대량 생산하면서부터다. 1919년 우리나라 사람인 양재하라는 사람이 황해도 사리원에 중국인 종업원을 고용해 광흥공장이라는 상호를 내고 천연 동결 방법으로 대량생산을 시작했다.

삶은 채소 요리로 호조판서 꿰차

종국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평양의 당면공장이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되었다. 당시 당면공장들이 서로 경쟁을 할 정도로 당면 소비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면이 들어간 잡채를 먹기 시작한 시기는 1920년 이후일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당면은 그 단일재료 자체로는 요리화하기가 쉽지도 않을뿐더러 주 영양성분인 탄수화물에 편중돼 당면 소비를 촉진하고자 광흥공장에서는 당면을 우리 고유음식인 기존 잡채에 넣는 요리법을 개발 보급하면서부터 당면 잡채가 시작되고, 1924년에 발간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잡채에 당면이 들어간 최초 기록이 나오게 된다.

   
당면을 넣어 먹기 시작한 잡채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고추잡채, 콩나물잡채 등 당면을 넣지 않은 다양한 잡채도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잡채 하면 당연히 당면이 들어간 잡채를 선호하는 편이다. 이처럼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음식 문화도 변하기 마련이다. 진미(珍味)를 즐기는 것도 좋지만 우리 음식의 옛 모습을 찾아보는 것도 미각을 즐기는 새로운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미국 캘리포니아 주 ASU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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