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적대는 도심 벗어나면 가을이 내품에

산청읍 들머리에 있는 어천 계곡은 산청 사람들이 손쉽게 찾는 쉼터라 할 만하다. 바깥에서 마음먹고 온 사람들이야 지리산 깊숙한 골짜기로 스며들겠지만, 날마다 쳐다보면서도 일상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산청 사람들이야 어디 그리하겠는가.
지리산 아니라도 가까운 데 물좋고 그늘 괜찮은 데 있다면 올 여름에도 탁족(濯足)을 하면서 식구들끼리 수박 한 덩이, 김밥 한 줄 나눠 먹었을 것이다. 객기가 살아남은 20대나 10대들은 쓴 소주 달게 마셨을 테고 벗들과 온 이들도 반주 삼아 한 잔씩은 걸쳤음직하다.
어쨌거나 유달리 무더웠던 지난 여름, 이 골짜기는 평일.주말 가릴 것 없이 산청 사람들로 복작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골짜기는 그리 깊거나 넓지 않다. 바로 옆에는 논뙈기까지 다닥다닥 붙어 있다. 하지만 조그맣게 집안식구들끼리 둥지 틀기에 딱 알맞은 바위나 모래밭.공터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물 또한 맑고 수풀까지 우거져 있어 골짜기에 들면 물에 손을 담그지 않았는데도 서늘한 느낌이 든다. 수천년 씻겨내려 이제는 있는대로 몸매를 드러낸 물가 바위가, 위쪽으로는 거무튀튀하고 아래쪽은 갓난애 살결처럼 보드라운 우리네 살색이나 옅은 흰색을 띠고 있다. 물이 많았을 때는 예까지 차올랐노라는 표시일 텐데 80cm는 좋이 돼 보인다.
지금은 물이 말라 깊어봐야 아랫도리 적실 만한 데도 찾기 어렵지만 한창 물 좋을 때는 꼬마들 키만큼한 깊이로 더위에 지친 이들을 꽤나 불러모았을 성싶다. 하지만 지금이야 그리 깊을 필요도 없고 오히려 성가시기만 할 것이니, 추분 지났다지만 아직도 한낮이면 끈적거리는 가을철 한나절을 보내기에는 이만한 데를 얻기도 쉽지 않겠다.
가만 물속을 들여다보면 이른바 다슬기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물은 맑아 바닥까지 다 비치는데 옆에는 몸 속이 환히 비치는 피리 같은 민물고기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바위 하나에만도 다슬기 수십 마리가 앉아 있다.
사실 ‘다슬기’라 해서는 말맛이 안난다. 어린 시절 기억은 ‘고딩이’와 이어져 있다. 세월이 달라진 데 따라 아무리 순화해야 한다 해도 ‘고동’ 이상은 안된다는 게 일종의 심리적 마지노선이라 할까.
“앗, 고동이다!” 길 따라 오르다가 골짜기로 접어들어 냇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 아이들은 얼굴이 환해지며 소리를 지른다. 애들도 평소에는 다슬기라 하다가도 막상 이렇게 한순간에 터져나올 때는 ‘고동’이라 이른다.
어른들이 할 일은 조그만 깡통이나 물병을 장만해 건네는 정도. 아이들은 신발을 신은 채 첨벙첨벙 물에 들어가 이리저리 바위를 훑어내리기에 바쁘다. 여기저기 바위를 건너뛰고 물 속을 오가면서 고둥이 있는 데를 찾아 일러줄 수도 있겠다.
그렇더라도 아이들 지켜보며 “작은 거는 그대로 둬라” 한 마디 거드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물론 아이들 욕심이 어디로 갈까, 나중에 살펴본 물병 안 바닥에는 먹지도 못하는 쪼그만 고둥들이 새까맣게 깔려 있을 것이다.
때때로 골짜기를 더듬어 오르면 도토리 말고 밤이 매달린 밤나무를 만날 수 있다. 산밤을 줍거나 딸 수 있는 것이다. 산에서 저절로 자란 산밤은 울타리를 쳐서 키운 나무하고 달라서 밤알이 조그맣다. 나중에 집에 갖고 와 삶아 놓으면 고소하고 토실토실한 게 알 굵은 개량종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맛을 입안 가득 베어물 수 있겠다.
산밤나무를 찾을 때는 가지를 쳐다보면 안된다. 밑바닥을 훑으면서 떨어진 밤송이가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야 한다. 밤송이가 눈에 띄면 근처를 더 뒤져 그냥 뒹굴거나 송이 안에 갇혀 있는 밤알을 끄집어내는 일부터 한다.
다음으로는 기울기에 따라 위쪽으로 눈길을 옮겨 나무를 찾고 가지를 흔들어 밤송이를 떨어뜨리면 되겠다. 식구 4명이 매달려 두어 시간 헤매도 한 되 채우기 어려우니 욕심을 너무 부리지는 말 일이다.
다람쥐나 청설모 따위 산짐승들 겨울 양식도 삼아야 하니까 말이다. 또하나, 골짜기 아래쪽에는 없지만, 위쪽의 울타리가 쳐진 산비탈의 밤나무에는 손대지 말아야 한다. 주인이 있는 나무에 손대는 것은 도둑질이기 때문이다.
어천계곡은 이처럼 점심 먹고 아이들과 들어와 물장구 치고 고둥 잡고 산밤 주우며 서너 시간 보내기에 알맞은 곳이다. 어떤 이는 그 새에 자리를 깔고 그늘에 누워 가볍게 낮잠을 즐기기도 한다. 오후 6시, 해가 짧아진 데다 산 높고 골 깊은 한가운데라 계곡을 벗어나왔는데도 이미 어둑어둑하다.

▶가볼만한 곳 - 간디학교

자가용 자동차를 몰고 왔으면 어천 계곡에서 내려오지 말고 쭉 올라 가볼 수도 있겠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아스팔트길이 위로 잇닿아 있다. 골짜기를 벗어나는 지점쯤의 ‘군립공원 웅석봉 관광안내도’에는 4.2km라고 적혀 있다. 길 끝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다보면 차를 세우고 자리를 깔만큼 괜찮은 풍경이 나타나기도 한다.
웅석봉 등산의 시발점으로는 산청읍내까지 들어가야 있는 내리의 지곡사가 널리 알려져 있다. 하루의 많은 시간을 산그늘에 가려 지내는 지곡사를 한 바퀴 둘러볼 수도 있고 내리에서 1km 남짓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가면 선녀폭포를 만날 수 있다.
산청에는 또 참다운 교육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간디학교가 있다. 초.중학생을 둔, 교육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학부모라면 이 간디학교에 들러 선생님과 아이들을 만나보고 교육에 대한 생각을 나눠보는 것도 괜찮겠다.
어천 계곡에서 산청쪽으로 가지 말고 진주로 되짚어 내려오면 2km쯤 되는 곳에 ‘흥화원’이라는 큼지막한 휴게소가 나온다. 휴게소에서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왼쪽으로 1.6km 올라가면 간디학교가 있다는 앉은뱅이 표지판이 나오는데 이를 놓치지 말고 따라가면 만날 수 있다.
간디학교 식구들은 사람들의 방문을 반기지만, 수업에 방해가 되거나 번거로워지는 걸 피해서 토.일요일에 찾아 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찾아가는 길

진주에서는 곧장 국도 3호선을 타고 올라가면 된다. 창원.마산에서는 남해고속도로 동마산 나들목으로 올려 서진주에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산청 나들목에서 빠져나오면 된다.
하지만 가을철에는 코스모스 하늘대는 국도를 따라가는 재미도 무시할 수 없다. 신마산 경남대학교 지난 14번 국도를 따라가다 고성 분기점에서 2번 국도로 옮겨타고 진주까지 와서 3번 국도로 가도 되지만 진주 시내를 가로질러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꺼린다.
남해고속도로에 올렸다가 의령 나들목으로 빠져 나오는 방법이 있다. 의령읍을 지난 다음 국도 20호선을 타고 합천.진주쪽으로 달린다. 여기서부터는 양쪽으로 너른 들판과 푸른 산이 번갈아 고개를 내민다. 길가에는 황금빛을 내는 외래종 금계국인가도 피어 있지만, 누렇게 익어가는 벼이삭과 아름답게 어울리는 것은 코스모스가 으뜸이다.
이 길은 대의고개로 이어진다. 꽤 높은 고개다. 고개에서 빠져나오면 오른쪽으로 합천 가는 길을 뒤로 하고 계속 가다 단성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꿔 들어간다. 다리를 건너지 말고 우회전해야 한다. 곧장 가면 국도 3호선으로 이어지는데 10분이 채 안 걸린다.
산청읍 들머리 조금 못 미쳐서 도로 공사가 한창인 데를 지나자마자 고속도로가 위로 지나가면서 국도 3호선과 만나는 지점이 나온다. 바로 여기서 울퉁불퉁 엉망으로 포장된 왼쪽길로 접어들어야 어천계곡으로 갈 수 있다.
내려가면 경호강. 차 2대가 겨우 비켜지나갈 정도로 좁은, 난간도 없는 잠수교가 놓여 있어 이편과 저편을 이어주고 있다. 강을 건너 길 따라 올라가다가 알맞은 데다 차를 세워두고 오른쪽으로 기어들면 모두 골짜기다.
대중교통으로는 진주에서 산청 가는 버스를 이용한다. 마산에서는 5분마다 있는 버스를 타고 진주까지 가서 갈아타야 한다. 산청읍에서는 경호강 따라 걸어도 되고 택시를 타면 바로 데려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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