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넝쿨따라 종소리 날 듯한 꽃송이

어제는 가을이 어디에서 익어가나 찾아 나섰습니다. 아직은 푸름 짙은 산야 여기저기서 산국 향이 물씬대고 구절초 따기 좋다는 구구절에 제사 많은 지리산 자락 시골 장터는 전쟁통에 식구 잃은 사람들의 빛바랜 기억에 아픔도 희미해지고 조기전만 북적댑니다. 바위산 아래 자락엔 땅심 얕아 버티기 힘든 붉나무·옻나무·화살나무 잎사귀들이 울긋불긋 홍조를 띱니다. 가을이 마악 익는 중입니다. 비어버린 벌판이 쓸쓸하지 않은 이유는 마을 어귀 뒷동산 주저리 늘어진 감나무 빨간 열매들 때문입니다. 어쩌면 풍년이 들어도 즐겁지 못하다는 부모님의 한숨 때문에 가을걷이 끝나버린 들판이 속 시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담장가나 울타리 가에 늘어진 박주가리 얘기를 할까 합니다. 짙푸른 잎사귀 사이로 작은 종모양의 자주색 꽃들을 조롱조롱 달고 있어 열매 익을 때가 넘은 놈이 웬 꽃만 이렇게 흐드러졌나 싶어 덩굴을 뒤지며 열매를 찾아봅니다. 칠팔월에 피고 진 꽃이 분명 열매를 익혀 지금쯤 파안대소하는 할아버지처럼 수염 휘날리며 터질 때가 되었는데도 어렵게 찾아 낸 열매는 고치 껍질처럼 막 익어가는 씨앗을 눈부신 솜털이 잘 싸고 한창 물 말리기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긴꼬투리에 둘러싸였던 껍질이 툭 터지면 허허야 웃어대던 할아버지의 큰 웃음처럼 활짝 씨앗이 터지고 씨수염은 바람을 타고 흩어질 것입니다.

박주가리 꽃.
얇고 깊은 뿌리가 번식력이 높아 몇 년을 두면 이내 넝쿨 울타리를 만들어버리는 박주가리는 다년생 초본으로 봄에 어린 줄기가 올라오면 나물을 해서 먹기도 하는데요. 잎줄기를 따면 하얀 유즙(乳汁)이 많이 솟아 나는데 이 성분은 독성이 있으므로 바로 먹는 것은 해롭습니다. 그렇지만 풍부한 유즙처럼 재미있게도 산모가 젖이 모자랄 때 줄기와 잎 말린 것은 달여 먹으면 흰 유액처럼 젖이 잘 나온다고 합니다. 얼핏 보면 하수오랑 닮았지만 전혀 다르며 한방에서는 전초를 '나마'라고 부르며 한약재로 많이 쓰입니다. 잎을 따면 나오는 유즙은 뱀이나 독충에 물렸을 때 발라주면 효과가 좋으며 잎과 열매를 달여서 먹으면 조루나 대하증을 치료한다고 합니다.

또 씨앗은 '나마자'라하여 정기를 보하고 조루를 치료하며 새살을 돋게 하는 데도 효과가 좋다고 합니다. 씨앗을 달고 늘어진 명주실 같은 털은 모아서 도장밥을 만들어 쓰거나 가늘게 꼬아서 실을 만들어 쓰기도 했답니다. 박주가리는 부분별로 쓰임새가 다른데 열매 껍질 말린 것을 '천장각'이라 하여 폐의 열을 내리고 담
 
   
 
을 삭이는 능력이 있어 겨울 감기나 기관지염에 달여서 복용하면 효험이 좋다고 합니다.

가장 흔하고 가장 천하며 강하게 살아남은 풀들이 질기디 질긴 생명력을 유지하며 우리와 함께 살고 집니다. 겨울이 되면 미련 없이 줄기와 잎을 버릴 줄 아는 풀꽃 한 포기의 생애에서 육욕을 채우기 위해 범죄도 마다 않는 인간의 욕심스런 삶을 반성해 볼 때입니다. 가을 들판의 풀들이 갈빛으로 스러져도 그것마저 아름다운 이유를, 한 해 동안 잘 먹고 치장하기 위해 쏟았던 물욕 성한 마음을 비워내며 배워 볼 일입니다.

/박덕선(경남환경교육문화센터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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