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한국을 방문한 LA축제재단 유의상 사무총장과 뉴거창관광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고, 서울로 가려던 참에 '대를 이은 맛집' 탈고가 임박해 고심하던 중 10여 년 전 찾아갔던 거창 '건계정' 닭찜이 생각났다.

뉴거창관광호텔 김기선 사장에게 "아직도 건계정 할머니가 장사를 합니까?" 하고 물으니 "아뇨. 아마 사위가 들어와 장사를 하는 것 같은데요"라고 했다. 마침 잘 됐다 싶어 김 사장의 차를 타고 호텔을 나와 '건계정'으로 향했다.

비가 온 후라 그런지 '건계정 계곡' 물줄기가 세차게 내리며 주변 풍광과 함께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음식 장사가 쉽지 않은데, 할머니가 아닌 젊은 사위가 물려받은 '건계정'의 닭찜 맛이 '예전과 같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문득, 길재의 시조 '…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다… '라는 시구도 떠올랐다.

별미집을 소개하는 작가로서 맛없는 집을 소개하는 것만큼 양심에 찔리는 것도 없다. 이는 독자를 우롱하는 것 같아 더욱 그렇다.

덕유산(德裕山)과 기백산(箕白山)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1543년 퇴계 이황 선생이 뛰어난 경치를 보고 시를 남긴 수승대를 적시고, 마리삼거리로 돌아 나와 거창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영강(瀯江)의 물줄기가 옛 원학동을 지나 건계정 계곡에 이른다. 그러면 수승대와는 다른, 또 다른 절경을 이루게 된다. 이 아름다운 풍광만큼 닭찜이 맛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대부분 관광지 주변 음식이 빼어난 경치에 비해 맛이 없고, 오히려 음식값이 비싸 바가지 쓴 기분이 들게 되면, 그 관광지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이미지 전체가 나빠지게 마련이다.

'건계정' 식당을 향하는 다리 밑 세찬 물줄기가 마치 신라 장수 천존과 흠순의 말발굽 소리처럼, 당나라군을 섬멸했던 거열주(居烈州, 지금의 거창) 대감 아진함과 신라군의 함성으로 들리는 듯했다.

상큼한 1대 닭찜, 각종 해물로 감칠맛 깊어진 2대 닭찜
30년 세월에도 변하지 않는 손맛에 손님 발길 여전


'건계정' 식당과 이웃하는 건계정(建溪亭, 경남도 문화재 자료 제457호)은 거창 장(章) 씨 문중이 1905년에 세운 것이다. 문중의 시조인 평보(平甫) 장종행(章宗行)이 고려 충렬왕(1240년) 때 중국으로부터 귀화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인 두민(斗民)이 공민왕 때 홍건적이 침입해 개경까지 점령당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군사를 지휘해 개경에서 홍건적을 몰아내 국난을 극복한 무훈을 세우자 이에 대한 공로로 공민왕이 두민을 아림군(娥林君)으로 봉했다. 이에 그 후손들이 두민의 공을 기려 세운 정자다.

'건계정' 식당은 거창 장씨 후손인 장성석(77) 씨가 1979년 자신이 대대로 살던 집에서 아내 김종녀(73) 씨의 닭찜 손맛을 선보이면서 30여 년을 지켜온 곳이다. 아내가 나이도 많고 해서 거창 읍내에 집을 마련해 이사를 하고, 대학을 나와 양산시 웅상읍에서 전기업을 하던 사위 박종구(41) 씨와 딸 장경아(41) 씨를 불러들여 가업을 잇게 했다.

'건계정' 2대 딸 장경아 씨(왼쪽)와 1대 친정어머니 김종녀 씨.
10여 년 전 취재를 와서 만났던 김종녀 할머니가 안 계시니 섭섭하긴 했지만, 젊은 사람들이 할머니의 손맛을 이어받았으니 '뭔가 다르겠지?' 하는 기대를 하고, 약 30분을 기다렸다. 해물닭찜이 나왔다.

1대 김종녀 할머니의 닭찜은 닭을 찹쌀·마늘·대추·인삼 등과 함께 푹 삶았다. 그리고 나선 파·마늘·고추·수제비·표고버섯 등 할머니 나름의 특이한 양념으로 매콤하고 상큼한 맛을 냈다. 그래서 거창의 유명한 향토 맛집(거창군 향토음식점 1호 지정)으로 전국에 알려졌다.

김종녀 할머니의 사위 박종구(왼쪽) 씨와 딸 장경아 씨가 2대째 '건계정' 닭찜 맛을 이어가고 있다.
2대 사위 박종구 씨와 딸 장경아 씨가 새롭게 만든 해물닭찜에는 예전 김종녀 할머니의 손맛과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홍합, 낙지, 새우 등 해물과 채소가 무려 10가지 넘게 들어가 닭찜과 어우러진다. 매콤하면서도 입안에 감칠맛이 돌았다.

할머니가 안 계신 '건계정' 식당의 맛에 대한 염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식당 입구 화이트보드에 20~30명 규모 예약손님 목록이 빼곡한 것을 봐도 이 집 맛의 대물림은 성공한 것 같다.

닭찜 3만 원·해물닭찜 4만 원·토종닭백숙 3만 5000원. 거창군 거창읍 상림리 745-2번지. 055-944-7833.

/김영복(경남대 산업대학원 식품공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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