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서예인으로 자처하는 이들 조차 ‘남 부끄러운 일’로 치부하는 일이 있었다. 24회 경남미술대전 서예부문에서 당당히 대상을 받았던 작품에 틀린 글자가 있는 것으로 판명돼 낙선처리된 일이다. 수상자는 하루아침에 ‘영광스런’ 몸에서 ‘뜻도 모르고 글의 기교만 익혔다’는 지탄을 듣는 것도 모자라, 향후 2년간 다른 대전에 출품조차 못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이런 불미스런 일은 지난 6월에도 있었다. 울산서예대전에 버젓이 대상작으로 선정돼 ‘폼나게’전시까지 하고 있었는데 틀린 글자소동이 벌어지자 주최측은 부랴부랴 낙선처리하고 전시실의 작품을 치웠다. 그 여파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오자파동이 재연됐으니 서예에 몸담은 이나 주변의 사람들조차 안쓰러울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이번 미술대전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한 심사위원의 ‘변명 아닌 변명’을 들어보자. “한문시가 워낙 다양해서 심사위원이라고 내용을 다 알 수 없다. 2차 심사땐 1차에서 걸러진 작품을 심사하는 것이라 내용을 보지는 않는다. 대 한학자를 모셔서 심사케하면 좋지만 비용이 만만찮다.”
심사자체를 소홀한 측면도 없진않지만 응모작자체가 많은데 어찌 일일이 내용까지 파악하겠냐는 것이다.
참 이상하다. 적지않이 그런 일이 재연되어왔다면 대책이 강구되었어야 했는데 매번‘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구두선에 그친 감이 없지않다. 간단히 생각해도 응모자가 출품할 때 어떤 내용에 대해 썼는지, 그 원문을 함께 제출토록하면 해결될 문제가 아닌지 모르겠다.
‘오자파동’ 소식이 나갔을 때 흥미로웠던 반응도 있었다. 대상을 받기까지 수월찮이 돈과 시간을 들였을텐데 안됐다는 것이다. 무료강좌를 이용한다든지 해서 최대한 절약해서 서예에 입문하고 연마하는 이도 있겠으나 알고보면 ‘골프 배우는 만큼’ 비용이 든다는 것이 서예세계를 아는 이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취미든 교양이든 배우려면 학원이라도 다녀야하고 세트로 마련할 붓이며 종이값까지 장난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인중 한사람은 다니던 직장 관두고 서예에 입문하려고 공부중인데 한달에 못들어도 15만~20만원은 훌쩍 든다고 했다. 대전에 출품하고 입상이라도 할라치면 출품료에 표구값 등 만만찮다. 이런 비용외 ‘별도’의 비용도 있는 모양인데, 지인은 덧붙이길 “더 이상 다른 얘긴 묻지말라” 했다.
원체 서예라는 것이 단기간에 어느 단계에 올라서는 것도 아니니 제대로 해보려면 인내심 못잖게 돈이 들 것이다. 돈있고 시간여유 되는 사람이 애써 배우는 것 자체를 나쁘다할 수는 없으나 지금의 풍토가 너무 서예자체의 풍류에 젖게하기 보다 명예욕에 사로잡히게 하고 ‘뜻은 모른 채 기교익히는 데만 몰두케 하는’건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혹 이 표현이 온전히 서예자체로 몸과 마음의 평정을 찾는 ‘예찬론자’에게 오해가 되지는 않길 바란다.)
서예인구가 많기는 많다. 1970~1980년 경 4.19, 5.16같은 격동기를 거치면서 점차 사회가 안정을 찾고 경제성장을 이룩한데다 서예연구자료와 재료가 보급되면서 취미와 교양을 위한 서예인구는 대단히 많아졌다. 이는 이번 24회 대전만 봐도 확연히 드러난다. 7개부문 총 출품수가 946점이었는데 그 중 서예만 절반이 넘는 479점이었다. 당연히 입상자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 것도 서예(총 입상자 443명중 220명)부문이었다. 미술대전에서의 서예부문이 이 정도인데 서예대전까지 열리니 오죽 많을 것인가.
하지만 이젠 좀 달라져야 할 것이다. 여타의 공모전도 그렇지만 미술대전의 입상자는 출품자의 절반가량이나 된다. 양적팽창만 계속된다는 평가가 나올 수 밖에 없다.
서예라는 말이 우리의 독자적 명칭을 갖기위해 생겼으니(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정부에서 미술전람회를 처음 열면서 ‘글씨 부문’이 다른 미술품과 함께 참여하게 되었을 때 서예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그 이전엔 일본인이 부르는대로 ‘서도(書道)’라고 했다) 독자성도 살리고, 질적 향상도 꾀할 수 있으면 좋겠다.
오늘 또 하나의 공모전, 13회 경남도서예대전이 열린다. 입상작이 발표되고 난 뒤 ‘어디 틀린 글자 없나’하는 엉뚱한 걱정을 더 이상 않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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