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심 담아 더 정갈한 ' 4대 두부'

우리나라에서는 두부를 포(泡)라고 하였으며, 능이나 원에 딸려서 제향에 쓰는 두부를 맡아 만드는 절을 조포사(造泡寺)라고 불렀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당시 속어나 어원을 연구해 <아언각비(雅言覺非)>를 저술했는데, 이 책에 의하면 "두부란 숙유(菽乳)다. 이름은 본래 백아순(白雅馴)인데, 이를 방언이라고 생각해 따로 이름하여 포(泡)라고 하였다. 여러 능원(陵園)에는 각각 승원(僧院)이 있어 여기서 두부를 만들어 바치게 하였으니 이 승원을 조포사(造泡寺)라고 하였다"라고 기록되었다.

조포사에 대한 설명은 또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김봉렬 교수는 "태조의 정비였던 신덕왕후 무덤인 정릉을 위해서 흥천사와 봉국사, 경국사 등이 중창되었고, 성종의 선릉에는 봉은사, 세조 광릉에는 봉선사, 사도세자 장릉에는 용주사 등이 경영되었다. 이들 능침(陵寢) 사찰들을 일컬어 조포사, 위축전, 자복사라고도 했다. '조포사'란 제사에 사용할 두부를 만드는 사찰이란 뜻이고, 다른 명칭은 왕실의 안녕과 복을 축원한다는 뜻이다. 비록 능침 사찰이 아니더라도 삼각산 화계사와 같이 흥선대원군의 개인적 후원에 의해 경영된 왕실원찰도 있었다"고 했다.

통도사에서 '단백질 공급원' 직접 만들던 1대로부터

3대 김말수 할머니
굳이 통도사가 조포사가 아니라도 절집이라면 으레 두부를 만들었다. 두부는 스님들의 단백질 공급원으로 꼭 필요한 음식이었기에 통도사의 두부 역시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구한말까지는 통도사 인근에 사는 사람치고 통도사와 인연을 맺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양산 하북면의 '원조손두부집' 이정남(56) 아주머니의 시증조부모 역시 통도사에 드나들며, 시증조부는 나무를 해대고 시증조모는 반찬을 만드는 채공간에서 두부를 만들었다고 한다.

통도사에서 두부를 만들던 이정남 아주머니의 시증조부모(1대)들은 절집 두부 만드는 방법을 아들인 고 박병조(2대) 씨에게 전수하였고, 박 씨는 통도사 뒤편 양산 하북면 지산리에서 두부를 만들어 통도사에 팔기 시작했다. 다시 그 기술이 며느리인 3대 김말수(93) 할머니에게 손 내림하여 지금의 증손자 며느리로서 4대 이정남(56) 아주머니까지 이르게 되었다.

일본은 가업을 300년에 이르기까지 내려왔다고 자랑하는 집이 많지만, 우리는 가업을 3대까지 이어져 내려온다는 것은 그리 흔치 않은 일이다.

비싸도 국산콩 고집하는 증손자 며느리에 이르기까지

4대 이정남 아주머니
이정남 사장은 "이 장사가 내 대에서 끊길 것 같다"고 말한다. 국산 콩을 고집하다 보니 콩을 구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콩 값이 비싸 이문도 별로 남지 않아 젊은 아들 내외가 대를 이을 것 같지는 않다고 한다. 만약 자식들이 나이 들어 이 장사를 해보겠다고 하면 몰라도 자신 역시 힘이 부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했다.

국산 콩이라 그런지 두부 맛이 고소하다. 막두부 위에 맛있게 무친 돌미나리를 올려 입에 넣으니 봄내음이 입안 가득한 게 감칠맛이 돈다. 그런데 원재료 조달이 어려워 힘들어하는 아주머니의 얼굴을 보니 마음엔 팍팍한 느낌이 들었고, 괜찮다고 하는 아주머니에게 두부 한 모 값을 쥐여주고 나오는 발걸음 역시 무거웠다.

우리가 언제까지 농수산물의 불안전한 유통체계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먹을거리 때문에 두려워해야 하는지 안타깝다.

원조손두부집. 두부 한 모 5000원.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273번지 평산마을. 055-382-8571.

/김영복(경남대 산업대학원 식품공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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