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지미 카터가 집짓기(?)를 위해 필자가 살고 있는 시골구석인 명석면(진주시 변방의 농촌)에 온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비록 시기를 달리했지만 이들은 모두 헬기를 타고 요란한 굉음과 함께 명석면에 왔다.
박정희는 1962년 11월 16일, 카터는 수십년 후인 2001년 8월 8일 각각 방문하였다. 박정희는 5.16쿠데타가 성공한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신분으로 수해로 대파된 가옥을 다시 신축하는 현장을 격려하기 위해 나타났고, 카터 역시 국제 사랑의 집짓기운동 자원봉사자로 집짓기를 격려하기 위해 찾아 왔던 것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박정희는 한 때 우리나라의 대통령이었고 카터 역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명석면을 방문할 당시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기 전이었고 카터는 대통령을 지낸 후였다. 이 둘이 1979년 6월 말 한미 양국의 정상으로서 서울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박정희는 살해되었고 카터는 아직까지 전세계를 누비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박정희와 카터에 대한 명석면민들의 기억은 이들 두 사람의 인연만큼이나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박정희는 쿠데타 직후 민심을 추스르기 위해 대민활동에 힘썼는데 그 하나로써 1962년 진주 서북부를 물바다로 만든 수해사태 때 명석면을 방문한 것이다.
진주의 산악에 위치한 시골구석에서 수해가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수재구호금 1만원을 긴급히 보냈고 이어 수해가 가장 극심했던 장소 중 하나였던 관지리를 찾아와 새로 집짓는 건축현장을 시찰하고 “무슨 일이든 협업으로 부락민들 서로가 합심하여 도와야만 좋은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하고, “정부는 결코 부지런히 일하는 자를 도우지 게으른 자는 도우지 않을 것”이라며 “부디 열심히 일하라”고 부락민들에게 당부하였다. 좋은 말이다.
마찬가지로 카터 역시 무주택 서민들을 위해 집을 짓는 ‘지미 카터 특별건축사업 2001’ 진주행사를 격려하기 위해 2001년 사랑의 집짓기 현장인 명석면 외율리를 방문한 것이다.
카터는 “18년째 무주택 서민들을 위한 사랑의 집짓기운동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다”며 “이번 사랑의 집짓기운동은 가진 계층과 주택없는 못가진 계층간을 연결하는 다리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한국전쟁 때 해군장교로서 참전했으며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역할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우리나라와는 인연이 깊음을 강조했고 “사랑의 집짓기운동을 우정을 돈독히 하는 계기로 만들자”며 자원봉사자들을 격려했다. 역시 좋은 말이다.
이렇게 집짓기를 격려하기 위해 명석면을 방문한 박정희와 카터였지만 그들이 직접 만나게 되었던 시기는 둘 다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이었고 핵무기 폐지와 주한미군 철수문제로 대립적인 감정의 골이 깊을 때였다.
그동안 반공을 빌미로 고문과 공작의 공포정치로써 유신체제를 확립하여 의회민주주의를 말살시킨 박정희의 영구독재 추진은 미군의 핵우산과 미국의 묵시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인권탄압과 미국에 대한 로비사건으로 인해 최소한 인권대통령이라고 자처한 카터의 입장은 불편하기 그지 없었다. 게다가 박정희는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방침에 대해 자주국방을 외치며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는 등 혈맹 관계에 균열을 일으켰다.
결국 카터는 1979년 서울을 방문, 박정희를 안심시키기 위해 한국내 인권을 더 이상 탄압하지 말라며 미군의 철수가 무기한 연기될 것임을 약속해 주고 말았다. 카터에게 있어서는 박정희의 인권탄압보다 핵무기 개발이 더 원치 않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두 대통령의 방문을 보고 필자는 명석면민의 한 사람으로서 과연 진정한 집짓기가 무엇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