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만에 다시 쓰는 취재기

▶최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과 보상심의위원회는 91년 경상대 ‘지리산결사대 사건’으로 실형을 살았던 빈지태씨(34.당시 경상대 경제학과)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공식 인정했다. 10년전 ‘빨치산과 일본 적군파를 모방한 극렬운동권의 소수 전위부대’라는 딱지를 선사받았던 이 사건이 10년만에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게 된 사연은 무었일까. 당시 지역주간지 기자로 유일하게 현장에 있었던 기자의 취재기를 통해 이 사건의 진상을 알아본다.<편집자주>

   
 
 
91년 10월 10일 오후 4시 30분쯤이었다.
기자가 급히 택시에서 내려 진주시 하대동 진주전문대(이후 문산읍으로 이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30~40여명의 경상대생들이 C동 101호 강의실에서 꿇어 않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에 앞서 기자는 진주전문대 총학생회장 선거를 앞두고 물리적 충돌이 벌어질 가능성을 몇일 전부터 감지하고 있었다.

‘운동권’과 ‘비운동권’이 맞붙게 된 이 학교 총학생회장 선거 과정에서 주로 여학생들로 구성된 운동권측 선거운동원들이 상대측 운동원들로부터 숱한 폭언과 협박에 시달려왔던 것. 이에 따라 운동권측 선거운동원들은 “강간을 해버리겠다”“너희가 선거에 이기면 다 죽여버리겠다”는 공공연한 협박에 질려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선거분위기는 줄곧 운동권측에 유리하게 진행됐고, 이날 투· 개표가 끝날 4시쯤에는 운동권측의 당선이 거의 확정적이었다.(실제로 이날 투표결과 200여표차로 운동권 후보인 천재동(당시 24세)씨가 당선됐다.)

이같은 상황을 예감하고 있던 기자는 4시쯤 진주전문대에 전화를 걸었다. 평소 취재협조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교지편집위원회나 학보사를 바꿔달라고 했더니 교환원이 머뭇거리며 “지금 통화가 안될 겁니다”고 하는 것이었다. 퍼뜩 스치는 게 있어 “싸움이 났죠?”하고 넘겨짚었더니 그렇다는 것이었다.

택시를 타고 이 학교로 가는 동안 기자는 흔히 일어나는 투표함 탈취 등 개표방해사건을 연상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본 상황은 전혀 딴판이었다.

강의실 바깥에는 수많은 진주전문대 학생들이 몰려와 있었고, 강의실 안에서는 각목을 든 건장한 체격의 청년들(비운동권 후보측)이 기세등등한 자세로 꿇어앉은 경상대생들의 ‘군기(?)’를 잡고 있었다. 고개를 들거나 자세가 흐트러질 경우 거침없이 발길질과 각목세례가 가해졌다.

이런 와중에 누가 연락을 했는지 후문 담장 바깥엔 경찰의 ‘닭장차’가 도착했다. 이 학교 교수· 학생들과 경찰이 모종의 협상을 벌이는 모습이 보였다.

이윽고 강의실에 ‘감금’당해있던 경상대 학생들이 예의 각목을 든 청년들의 감시를 받으며 머리에 양손을 올린 채 ‘오리걸음’으로 줄줄이 끌려 나왔다.

기자는 보기드문 이 광경을 담기 위해 카메라 셔터를 열심히 눌렀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있던 중 누군가가 “저새끼 뭐야”하고 고함을 질렀다. 순식간에 건장한 학생 10여명이 거친 욕설을 하며 기자를 에워쌌다.

“너 누구 허락받고 사진찍는거야.”
“취재기자인데요.”
“이새끼 지랄하고 있네. 죽으려고 환장했구만.”

순간 누군가가 카메라를 휙 나꿔챘다. 기자는 죽을 힘을 다해 카메라 어깨끈을 잡고 늘어졌다. 그러나 한꺼번에 달려드는 청년들의 완강한 힘에 도리없이 카메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학생이 담벼락을 향해 카메라를 힘껏 던지려던 찰라였다. 평소 알고 지내던 이 학교 교수가 달려와 학생을 만류했다. 그는 흥분한 학생을 설득한 끝에 필름을 꺼내 학생에게 넘겨준 후 빈 카메라만 기자에게 돌려줬다.

이 과정에서 끌려나온 경상대생들은 후문 담장 바깥에서 대기중이던 ‘닭장차’에 고스란히 인계됐다. 이렇게 연행된 학생은 33명.

상황이 종료된 후 기자는 처음부터 현장을 목격한 학생들을 상대로 취재를 시작했다.

선거 하루 전인 9일 진주전문대 선거유세 과정에서 양측 후보 지지자들간에 욕설과 폭언 등 다툼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진주·충무지역총학생회협의회(진충총협· 의장 이일균 경상대총학생회장)에 접수됐다.

이튿날인 10일 오전 진충총협은 이 학교 선거개표후 폭력사태가 예상된다며 급히 경상대에서 사수대를 모집, 40여명을 진주전문대에 파견했다. 40여명의 경상대생들은 이날 오후 3시30분께 진주전문대에 도착, 개표장과 떨어진 강의실에서 이 학교 학보를 보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4시께 운동권 후보의 당선이 거의 확정될 무렵, 갑자기 강의실 유리창이 깨지면서 앞문과 뒷문으로 15명 가량의 진주전문대 학생들이 각목을 들고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위협을 느낀 경상대생 중 한명이 비닐봉지에 싼 최루가루를 뿌렸고, 몇몇 학생이 강의실 밖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바깥에 있던 수많은 진주전문대생에게 포위당해 이들 역시 제대로 저항도 못해본 채 붙잡혔다.

이 과정에서 경상대생들은 천막가방 속에 넣어 간 쇠파이프를 미처 꺼낼 사이도 없이 모두 빼앗겼으며, 각목과 책상, 빼앗긴 쇠파이프 등에 의해 폭행을 당했다. 완전히 제압당한 경상대생들은 강의실에 꿇어앉은 채 진주전문대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이 학교에 들어온 경위 등에 대한 진술서를 썼다. 이 진술서와 쇠파이프· 최루탄 등은 모두 ‘증거품’으로 경찰에 인수인계됐다.

당시 기자는 재직중이던 <남강신문>(이후 진주신문으로 통합)을 통해 ‘언론보도 어디까지 믿을 것인가-진주전문대 사태에 대한 보도를 보고’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의 진상을 보도했다. 그러나 당시 일간지는 이를 철저히 묵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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