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열던 그 목소리 '재첩국 사이소'

▲ 1대 이상태(67) 김순봉(66) 부부

"형수 갱조갯국 장사만 한 게 없을 것 같아 시작한 게 자식들까지 대물림하네요."

섬진강 은빛 물결이 내려다보이는 신방마을에 재첩국 장사하는 집이 네댓 집이 있지만 본디 갱조개를 모르면 다 외지 사람들이다. 원래 섬진강 사람들은 재첩이라 부르지 않고 갱조개라고 불렀다.

그럼 어떤 것이 표준어일까? 한마디로 다 표준어는 아니다. 이 조개의 원래 학명(學名)은 가막조개다. 이 가막조개를 낙동강을 연한 부산 사람들은 재첩이라 불렀고, 섬진강을 연한 하동·광양·구례 사람들은 갱조개라고 불렀다.

60~70년대 부산이 더 유명 … 하동조개 대부분 부산으로 팔려 가

1960~70년대 낙동강 하구언을 생활 터전으로 살던 부산 사상 사람들은 낙동강에서 잡은 가막조개로 밤새 재첩국을 끓여 양철통에 담아 볏짚 똬리를 해 머리에 이고 "재첩국 사이소!"를 외치며 구포시장을 지나 만덕터널을 넘어 구포 장에 이르면 먼동이 튼다고 했다. 여인숙 좁은 길로 다니며 외치던 새벽 선잠을 깨우는 이 소리는 우리에게 친근했던 삶의 소리였다.

이때 하동에서는 섬진강에서 잡은 가막조개로 갱조갯국을 끓여 양철통에 담아 머리에 이고 하동 신방촌 나루에서 배로 건너 전남 광양 구르게 나루에 내려 인근 평마을, 오추골, 샛터 등지와 경남 하동 고전면 소재지나 지수 멀게는 진주까지 다니며 "갱조갯국 사이소!"를 외쳤다고 한다.

보릿고개 시절이었던 1960~70년대 갱조개를 팔면서 산촌이나 농촌으로 다니다 보면, 갱조갯국을 못 먹은 사람들은 부황 든 것처럼 얼굴이 누렇게 변했으나 섬진강 하류 사람들은 갱조갯국이라도 마셔서 그런지 얼굴빛이 좋았다고 한다.

당시 갱조갯국 한 그릇에 5원을 받았지만, 대부분 농촌에서는 갱조갯국과 보리쌀이나 마늘, 고추 등으로 물물 교환해 집에 돌아올 때는 갱조갯국과 바꾼 농산물 보따리가 더 무거웠다고 한다.

특히, 하동군 고전면 전도리 신방마을은 섬진강 재첩 조개의 집산지나 다름없었다.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재첩 조개를 잡아 밤새 끓여 양철통에 담고, 식지 말라고 천을 둘러 싸매 머리에 이고 다니며 장사를 했지만 외지에서 배를 가지고 온 사람들은 갱조개를 잡아 부산에 팔았다.
1967년 신방마을에 군에서 갓 제대한 이상태(67) 씨는 형수 박타관녀가 매일 같이 갱조갯국을 끓여 진주 고려병원에 배달을 하는 것을 보고, 갱조갯국이 좋기는 좋은가 보구나고 생각하던 중 마침 집에 외지에서 배를 가지고 와 갱조개 잡는 사람들이 이상태·김순봉(66) 부부에게 '기왕이면 이 갱조갯국을 끓여 팔지 않겠느냐?'라고 말해 시작한 장사가 벌써 40년이 넘었다.


아들 이윤종(33)·며느리 임정례(31)에게 장사를 권해 대물림한 지가 1998년이니 벌써 10년이라고 한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만 해도 대도시인 부산 재첩국 하면 전국에서 알아줘 섬진강 갱조개도 대부분 장사꾼을 통해 부산으로 다 팔려나가 갱조개라고 부르던 가막조개가 섬진강에서조차 재첩 조개로 불릴 정도인데, 낙동강 물이 오염되면서 부산의 재첩국은 그 명성을 잃고 하동의 갱조개가 재첩국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해 이제는 하동재첩국이 더 유명해졌다.

갱조개를 강조개의 사투리라고 하나 사실은 국을 끓여 먹는 민물조개라고 해서 갱조개(羹貝)라고 하는데, 재첩 조개(在妾貝)는 과연 무슨 뜻이 숨어 있을까?

40년 전 신방마을에 조개 잡으러 온 외지사람 권유로 장사 시작

심청전에 "곽씨 부인이 심청이를 낳을 때 심봉사가 심청이의 살을 더듬어 보고 '묵은 조개가 햇 조개를 낳았다'고"한 대목이 나온다. 이렇듯 조개는 여자를 상징하지만, 조개(貝)류는 외쪽으로 되어 있는 전복 등 말고는 조가비가 닫힐 때 그 강력함과 두 쪽의 물림이 빈틈이 없어 잘 맞으며 서로 다른 같은 크기의 조가비를 맞춰도 물리지 않기 때문에 조개는 일부일처(一夫一妻)의 교훈으로 삼고 있다.

▼ 2대 이윤종(33) 임정례(31) 부부
그러나 조개 중에도 가막조개만큼은 재첩 조개라는 이름을 얻을 만큼 일부일처의 교훈과는 거리가 먼 안타까운 전설이 있다.

옛날 강 하구에 두 아내를 거느리고 사는 어부가 있었다. 그런데 조강지처와 첩 사이가 얼마나 정분이 좋았던지 둘 사이는 마치 친자매 이상으로 잘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부는 배가 난파되어 실종되고 말았다. 졸지에 과부가 된 두 여인은 소복을 하고 서로 의지한 채 3년여 한 방에서 같이 살다가 3년 탈상을 한 후 어부가 실종된 강가에 신발을 나란히 벗어 놓고 강물이 투신했다.

동네 사람들은 두 여인의 시신을 찾으려고 강바닥을 뒤졌으나 시신은 없고 재첩(在妾) 조개만 잡혔는데, 어부는 죽어서도 자신의 뒤를 따라온 두 여인을 거느리고 한 방에 사는 재첩 조개가 되었다고 한다.

재첩 조갯살은 다른 조개와 달리 뫼 산(山)자 모양으로 되어 있다. 같은 각질, 즉 한 방에서 양편에 두 아내를 거느리고 산다고 해서 재첩 조개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어쨌든 신방마을의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는 원조재첩나루터식당은 이제 아들과 며느리까지 대를 이어 재첩요리의 맛을 유지하고 있다.

이상태 씨는 아들 부부에게 힘든 장사를 대물림한다는 것이 때로는 미안한 생각도 들지만 곱디고운 며느리까지 요즘 같이 힘든 세상에 가업을 이어 아주 풍족하지는 않지만 큰 어려움 없이 산다는 게 다행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한편으로는 큰 위안이 된다고 한다.

하동군 고전면 전도리 신방마을 원조재첩나루터식당. 055-882-1370·055-883-1535.

/김영복(경남대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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