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내가 투명한 갈색을 유지하기 위해서 차가운 냉욕도 무릅쓴다는 사실을. 내 몸통을 둘러싼 이 갑갑한 비닐만 아니면 정말 파릇파릇 살아서 백 미터 달리기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백화점 지하 냉장고 진열장에 갇혀 팔려가기만 기다리는 내 신세.

어쨌든 오늘 나의 몸값은 200g에 3720원입니다. 비싸다고요· 저도 오늘은 물 만난 고기라고요.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설 대목이거든요. 제사상에 빠지지 않는 저는 오늘 몸값도 오르고, 아줌마들 손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는 인기 있는 몸이랍니다.

아, 참 저의 소개가 늦었군요. 저의 고향은 경상남도 창녕 어느 물 맑고, 깊은 골짜기이고요. 별명은 고춘자에요. 아, 있잖아요. 우리나라 만담의 최고 커플 장소팔·고춘자말이예요. 제가 워낙 입담이 좋아서 버섯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별명 이에요. 이름은 순수 한국산 갈색 롱다리 고사리.

사람들은 설 대목이 되면 체면치레에 바쁘지요. 양말·손수건·식용유·참치세트 이런 작고 유익한 선물을 하면 얼마나 좋아요. 그리고 감사의 마음을 담은 엽서 한 장이면 금상첨화 아니겠어요· 그런데 비싼 수입 양주, 갈비짝을 선물해야만 체면이 선다나요! 저희 할아버지께서 그러시는 데, 옛날에는 담 너머로 떡 한 조각, 나물 한 접시 나누어 먹는 인정이 있었답니다. 그 때, 우리 고사리들도 한창 인기가 좋았다나요.

“야, 고사리 조용히 좀 해! 너는 그렇게 조잘대면 입도 안 아프냐· 팔리지도 않은 주제에….”

“알…았어요. 무 아저씨.”

고사리 체면이 말도 아니네요. 무 아저씨가 오늘 컨디션이 안 좋으신가 봅니다. 아마도 오늘 따라 아줌마들이 무를 거들떠보지 않아서 화가 나신 모양입니다. 무 아저씨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조용히 이야기할게요. 옛날 재래시장에는 설 대목이 되면 저희들이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답니다. 그리고 ‘덤’이라는 인정이 있어서 팔려나가는 저희들 마음도 흐뭇했답니다.

세상이 또 변한 것. 아니, 사람들이 변한 것이 하나 더 있어요. 바로 설 연휴를 맞이해서 스키장 가는 족속들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저희 고사리들도 말이죠. 아무리 백화점에서 포장되어 팔려 나가는 하찮은 존재도 어른들은 알아 본다고요. 어른들이 오시면 좋은 자리, 잘 팔리는 자리로 양보하고요. 인사도 얼마나 잘하는 데요. 그런데 매일 잘난 체 잘 하는 사람들은 조상이 뭔지 모르고, 어른이 뭔지 몰라요. 한심하지 않아요· 설날이 되어도 떡국 한 그릇도, 맛있는 고사리 나물도 드시지 못하는 외로우신 할아버지·할머니가 얼마나 많이 계신데요. 이 고사리가 눈물이 다 나려고 그러네.

“ 쎄쎄(고맙습니다).”

어, 웬일입니까· 어떤 아줌마가 중국산 고사리를 집어 갔어요. 아줌마! 순수 토종 한국산 고사리는 저라고요! 바로 저 고춘자 고사리. 요즘 아줌마들은 중국산·한국산 제대로 구분할 줄도 몰라요. 그걸 버젓이 한국산이라고 상표 붙여 파는 아저씨들은 더 미워요. 흑흑흑.

“어, 이 고사리 싱싱해 보이네. 영철이 엄마 이 고사리 사 가지고 가요.”

“정말, 고사리 색깔 좋네.”

“아줌마 고맙습니다. 탁월한 선택을 하셨습니다. 정말로 고사리 보실 줄 아시네.”

이제 롱다리 고사리는 백화점 진열장을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떠나기 전에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사람들의 이런저런 흉을 보고 수다를 떨었습니다. 그렇다고 고사리를 너무 미워하진 말아 주세요. 그래도 사람들의 설날은 아직까지 따뜻하기만 하답니다. 왜냐하면 교통 지옥을 뚫고 고향을 찾고, 부모·친척을 찾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반겨주는 인심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부엌에서 열심히 일하고 계실 전국의 아주머니들 고생이 많습니다.

그럼, 제사상에 올라갈 거룩한 몸, 이 고사리는 이만 퇴장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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