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15일 개관해 3월15일까지 두달에 걸쳐 원 성산아트홀에서 열리고 있는 <2001 오딧세이>전은 호머의<오딧세이아>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년작)를 텍스트로 한 전시로 문명비판과 인간의 철학적·종교적 주제를 다룬다.(오는 3월 15일까지 전시)

신과 인간의 대화, 과학기술의 발전과 비인간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등을 배경으로 현대미술의 혼돈과 방향, 그 미래까지 예측하고 있다.

이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호머의 <오디세이아>와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를 기본적으로 알아야 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오딧세이는 나약하면서 여러가지 죄악을 지닌 존재임에도 ‘인간적 사랑’이 바탕되어 신보다 더 위대한 존재로 그려진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는 경이로운 우주공간과 우주선의 기하학적 구조가 영화전반부에 걸쳐 플롯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제시된다. 특히 왈츠곡 <푸른 다뉴브강>에 맞춰 춤추는 우주선의 장면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영화에서 인간은 도구와 무기의 개발로 문명을 이룩하지만 그 과학적 기술의 진보는 나아가 인간의 비인간화를 낳고, 마침내 2001년에 즈음해서는 컴퓨터가 더 인간적인 감성을 지니게 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과학문명의 발달은 곧 커뮤니케이션의 발달과도 그 맥을 같이 하는데 이 소통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주체는 간접적이 되며, 그에 대한 신화가 커질수록 진실은 왜곡되기 쉽다.

완벽한 컴퓨터가 소통의 왜곡을 가져오고, 불행한 사고를 불러일으키며, 인간의 유대는 점차 상실되어 간다.

영화는 과학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생명의 신비를 신에게 물을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무한한 우주공간속에 펼쳐놓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는 6개의 소주제에 맞춰 6명의 큐레이터가 각자 문제를 풀어가는 다양한 시각을 보여준다. ‘아르고스의 눈’이라는 주제의 제 1 전시실은 작가 8명의 작품들로 이뤄져있다. 아르고스는 100개의 눈이 달린 신화속의 괴물로, 현대사회에서 완벽한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 않는 봐이어리즘(Voyourism·엿보기)의 상징적 은유로 보인다. 인간의 개인성이 완전히 보장된 안전한 공간이란 존재하는가. 우리를 도청하고 감시하는 현대판 아르고스는 권력의 실체가 되어 인간행동에 깊숙이 개입한다.

기에 통제되듯 인간은 어느덧 자신의 주체를 양도한다. 적절한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제어기구가 통제·감시·도청의 기능만 부각될 때 그 자리엔 오직 피곤함, 강박관념, 이중적 행동만이 뒤따를 뿐이다.

전시장 입구를 들어서서 처음 대하는 김형기의 비디오 설치물 ‘들여다보기’는 이러한 현대 사회의 구조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시각적 경험을 유도한다. 이용섭·황언석의 설치작업 ‘관음; 미디어’를 통해 정영혁의 젠더 포토물 ‘우먼시리즈’에 이르면 이 공간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신에 대한 감시와 통제에는 불쾌해하면서도 타인의 사고패턴이나 행동양식은 은근히 엿보며 즐기는 이중성이 있다는 확인이다. 이는 미래에도 인간에게 안전한 공간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음을 예감하게 한다.

른 다뉴브강’이란 주제의 제 2전시실에 들어서면 안종연의 설치작업 ‘Earth, Stars and People’을 보게 되는데, 크고 작은 유리구슬과 거기에 반영되는 빛의 조화가 은하수에 떠있는 느낌이다. 나란히 연결된 서정국의 ‘별들의 고향’과 도흥록의 ‘Magic Apples’가 연출된 공간은 그 속에 잠시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생소함과 공포감을 주며 인간이란 참으로 미미한 존재임을 확인시켜준다.

명상을 유도하는 공간처럼 보이는 제 3전시실에 설치된 황규태의 ‘외로운 섬’은 타이트 박스위의 사진들로 암흑의 우주공간속에 떠있는 행성의 의미다. 이미지는 지구가 인간 개인적 시각적 형상일 수도 있고, 자연의 또다른 얼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Retern Alive’(생환)란 주제로 짐작할 수 있듯 제 4 전시실은 성공적 귀환을 통한 자연과 문명의 조화, 기계와 인간의 공존, 초월과 순환을 반복하는 인간의지의 변증법적 속성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박동국의 비디오작업 ‘피레네 섬에 있는 성’은 빛에 의한 영상표현임에도 회화같은 질감(마티에르)을 보여주면서 자못 동화적 느낌마저 불러 일으킨다.

5 전시실의 평면작업들은 이번 전시의 여타 작업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인상이다. 비디오 영상물·설치작품·사진·음향기구와 오브제 등으로 이뤄진 현대문명의 메커니즘을 통하지않고 캔버스· 패널·화선지 위의 유화· 아크릴·수묵 등의 전통적 방식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래서 주제도 ‘제 3의 풍경’일까.

이 전시실에선 비교적 일반관람객들에게 익숙한 평면회화가 차라리 낯설어지는 아이러니함이 느껴지는 점이 독특하다. 그러나 김지원의 연작 ‘비슷한 벽, 똑같은 벽’, 유근택의 ‘다섯개의 정원 1,2,3,4,5’ 등을 통한 인간내면의 풍경과 김보중의 ‘숲의 순례자’에서 보이는 자연과 인간과의 교감 등은 이 작업들 역시 오딧세이의 연장선에 서 있음을 깨닫게 한다.

‘창원 오딧세이’라는 제 6 전시실은 외지 작가들의 눈에 비친 이 지역의 다양한 이미지들이다. 이는 사진·드로잉·설치 등을 통해 다시 지역민의 눈에 비친다. 이는 작가에겐 피상적이고 찰나적인 풍경의 경험이지만 이 순간적 포착이 우리에겐 가장 일상적이고 익숙한 느낌의 주변상황이라는 강한 설득력을 준다.

다양한 시각적 경험을 하게 해주는 이번 전시는 궁극적으로 인간성 구현의 흔적, 무한한 우주공간속에서의 유한적인 인간존재를 보여줌으로써 우리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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