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김해 차 시배지 흔적 고스란히…신라 흥덕왕 때 당나라서 대렴이 종자를 가져와 심은 시배지

소년시절 영남의 절간에서 손님되어

명전(茗戰), 신선놀이 여러번 참여했지

용암(龍岩)의 바위가 봉산(鳳山)의 기슭

대숲에서 스님따라 매부리 같은 차잎을 땄다.

한식전에 만든 차가 제일 좋다는데

용천봉정(龍泉鳳井)의 물까지 있음에랴

사미승(沙彌僧) 시원스런 삼매의 손길

찻잔 속에 설유를 쉬지 않고 넣었지

돌아와선 벼슬따라 풍진 세상 치달리면서

세상살이 남북으로 두루 맛보았지

이제 늙고 병들어 한가한 방에 누웠거니

쓸데없이 분주함은 나의 일 아니로다

양략(羊酪)도 순갱(蓴羹)도 생각없고

호화로운 집 풍류 또한 부럽지 않다네

-생략-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관 이연종(李衍宗)의 시 '사박치암혜다(謝朴恥庵惠茶)' 중>

신라 흥덕왕 때 당나라 에서 사신 대렴이 차를 가져와 심었다는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 세워져 있는 차 시배지 표지석.
신라 흥덕왕 3년(서기 828)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대렴이 문종 황제로부터 차(茶) 대접을 받고 차종자를 가져와 왕명으로 이듬해 봄에 차나무가 자라기에 최적지인 지리산에 심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보면 차는 선덕여왕(632-647) 때부터 있었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의 '흥덕왕조 3년(828년) 12월에 당에 사신으로 갔다 온 대렴이 차 씨를 가져왔기에 왕은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는 기록이 차의 중국 원조론의 주된 배경이 되고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문무왕 661년 왕의 17세손 갱세급관이 조정의 뜻과 공전을 받아 술, 떡, 밥, 차, 과일 등의 음식을 차려 김수로왕 가의 시제를 지냈다고 되어 있다. 수입된 것을 제사상에 올릴 수 없는 풍습을 고려할 때 이미 5세기 이전에 자생 차와 함께 차례 또는 헌다의 문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당(唐)의 육우(陸羽, 최초의 차에 관한 저술 <다경>을 쓴 인물)보다 반세기 앞서 신라 설총이 화왕계(花王戒, 681~692년)에서 신문왕에게 간하기를 '차와 술로써 정신을 깨끗이 해야 한다'고 한 것이라든가, 신농(神農)의 고채(苦菜)에 관한 기록(중국에서도 '茶'자가 관청에서 정한 공식 한자어가 된 것은 당 현종 735년에 이르러서이며, 그전까지는 '도茶' 또는 '고채'라고 표기됐으며 그러한 고채의 약효를 처음 기록한 전설적 인물이 신농으로서, 그는 한족이 동쪽으로 이동하기 전의 동이족의 조상으로 알려졌다), 신라 사선(四仙)의 전다구(煎茶具), 보천·효명태자의 헌공다례 기록, 고구려 고총에서 출토된 덩어리 차(錢茶)와 구다국(句茶國)의 지명, 집안형 출토의 도제 점다용 부뚜막, 백제의 일본 귀화승 행기(行基)에 관한 동대사요록의 기록 등 7세기는커녕 5세기에서 기원전에 거슬러 올라가기까지 우리의 차 문화는 때로는 중국과의 교류를 통하였을지언정 이미 자체도 곳곳에 상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가야국기'에 금관가야의 김수로왕비로 시집오면서 차와 차씨를 가져왔다고 기록되어 있는 인도 아유타국 공주인 허황옥.
◇김해 허황옥과 관련된 곳엔 차가 있다


가야국기(伽倻國記)에 김대렴이 중국에서 차를 가져 온 흥덕왕 3년보다 700여 년 앞서 인도 아유타국 공주인 허황옥(許黃玉, 33-89)이 금관가야의 김수로왕의 비로 시집오면서 차와 차 씨를 가져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능화(1869~1943)는 <조선불교통사>에서 창원 백월산 죽로차설을 제기해 대렴이 가져온 차종보다 우리 차의 역사를 천 년이나 앞당겨 버렸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의하면 "세상에 전하기를 수로왕비 허씨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 씨앗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백월산이 차의 시배지로 일반인들에게 각인된 것은 이처럼 최근의 일이다. 몇몇 연구가들에 의해 창원 북면 월백리 백월사 주변에서 남사(南寺)라는 명문이 발견됨으로써 백월산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곳은 바로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성불지(成佛地)이기도 하다.

아직도 백월산에서 차나무를 발견했다는 소식은 없다. 그러나 김해의 지명 중에는 차(茶) 자가 들어간 찻골(茶洞), 다전리(茶田里), 차호리(茶戶里), 다곡(茶谷) 등이 있는데, 이런 곳에는 대부분 차가 자생하고 있다.

김해 곳곳에 차나무가 자생하고, 허황옥과 장유화상, 허황옥의 자녀와 관계있는 곳에는 거의 차가 있다. 지금의 야요디아는 인도의 차산지 아삼 지방과 얼마쯤의 거리에 있을까. 중국의 사천은 운남과 함께 세계적 학자들에 의해 세계 최초의 차의 발원지로 규정된 곳이라는 것도 떠올려본다.

<삼국유사> 권2 '가락국기'에 문무왕 즉위년 661년 3월, 문무왕은 자신이 수로왕의 16대 방손(傍孫)이므로, 수로왕의 묘를 종묘에 합조하고 제사를 계속하라는 조칙을 내렸다. 그리고 수로왕의 17대 후손 갱세급간으로 하여금 왕위전을 관리하게 하고, 가락국의 제2대 거등왕 즉위년 제정된 세시에 따라 술, 단술, 밥, 차, 과일 등을 갖추어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초의 스님이 <다신전>을 초록(抄錄)했고, 지금도 차 생산지로 유명한 지리산 '칠불암' 현판기에는 장유화상이 보옥선사라고 되어 있으며, 누이동생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왔고, 또 허황옥은 수로왕과 결혼했으며 자녀 10명에 관한 내용도 있다. 김대렴이 중국에서 차를 가져다 심었다는 지리산 자락도, 허왕옥이 인도에서 차 씨를 가지고 도착한 곳도 경남의 김해다.

   
 
 
◇경남 야생녹차 우수한데도 녹차시장 여건 어려워


중국에서 차를 가져 와 심은 시배지나, 이보다 700여 년이나 앞서 허황옥이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차 씨(茶種子)를 가져와 심은 곳도 다 경남이다. 고려 때 이연종이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절간에서 쉬면서 차를 따며 말년을 보낸 것을 보면, 경남의 녹차는 야생에 가까운 우수한 품종을 자랑한다.

경남의 야생녹차는 단지형 녹차와 차별화 전략으로 다른 지역의 녹차보다 우수한 품질을 내세워 높은 가격을 받아 왔다. 그러나 전국적인 녹차시장 악화는 경남도 역시 피해 갈 수 없는 위기로 다가와 있다.

전남 보성과 제주특별자치도 등이 녹차 재배면적을 늘리면서 경쟁적으로 녹차 생산량을 늘려나가고 있다. 그러나 국내외적인 녹차시장 여건은 좋지가 않다. 차 재배 면적과 건엽 생산량은 해마다 늘어나 2002년 1900ha, 1490t에서 2005년 3042ha, 3309t으로, 2015년에는 4000ha, 9000t에 달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처럼 생산량의 증가와 외국 발효차의 수입, 녹차 농약검출 파문으로 녹차 재고량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저관세 발효차 수입은 2003년 2345t에서 2005년에는 3500t으로 증가하였다. 이로 말미암은 농촌진흥청 작물과학원 목포시험장의 '국내 농가 녹차재고 현황'을 보면 연도별 국내 녹차 재고량은 2005년 전국적으로 130t에 불과했지만 1년 사이에 무려 770t이 늘어 2006년 말에는 900t으로 급증했으며, '농약 녹차' 파동으로 현재 1000t을 훨씬 웃돌고 있다고 작물과학원 측은 분석했다.

지역별 2006년 녹차 재고량은 보성 350t, 경남 하동 300t, 순천 50t, 구례 30t, 광양 20t, 기타 150t 등 경남 하동이 보성 다음으로 재고량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다. 이와 함께 녹차 생엽 가격은 1㎏당 2004년 1700원에서 2005년 2200원, 지난해 1300원, 올해는 500∼1000원대로 하락했으며, 고급 녹차 중 하나인 '세작' 가격도 2005년 3만 원에서 2006년 2만 8000원, 올해 2만 2000원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는 녹차재배 농민들의 심각한 위기다. 이제 도는 녹차 신규단지 지원을 중단하고 기존 단지와 재배농민 중심으로 품질 고급화와 차별화, 생산비 절감에 주력함과 동시에 녹차 가공공장, 녹차 유통법인을 설립하여 위기를 탈출할 수 있는 활로를 열어야 할 시기다.

한편, 범도민적인 역량을 모아 다양한 문화 이벤트를 만들어 홍보는 물론 차 인구의 저변을 확대해 나가야 할 것이다. 차 시배지 경남의 차 산업 육성은 경남인의 자존심이다. 이제부터 경남을 차 문화산업의 메카로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김명자(김해 다례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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