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경남 항쟁의 기록](24) 중소도시로 시위 확산

6월 18일은 국민운동본부가 선포한 '최루탄 추방의 날'이었다. 그날까지 경남도내에서도 최루탄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그날까지 마산에서만 황선윤(27·농업), 이종명(창신고 3), 왕세근(29·노동자), 박영주(29·출판업) 등 4명의 최루탄 부상자가 국민운동본부에 의해 집계돼 있었다.

<워싱턴포스트> 87년 6월 18일자에 보도된 '한국 시위 지방도시로 확산' 기사.

이에 따라 경남대와 창원대·경상대생들이 교문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며 투석시위를 벌였고, 특히 경남대 앞에서는 이날 오후 5시30분 경찰이 학생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심한 구타를 자행했다.

이 때문에 지켜보던 시민 300여 명과 학생 등 500여 명이 진압을 지휘하기 위해 현장에 나와 있던 황문규 마산경찰서장을 에워싸고 심하게 항의하기도 했던 것으로 당시 한 신문기자의 정보보고에 기록돼 있다. 흥분한 학생과 시민들은 5시40분부터 댓거리에서 도로를 차단하고 농성을 벌이다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자 일단 해산했다. 이들 중 200여 명은 고성 쪽 도로를 차단하고 돌과 화염병을 투척하며 경찰과 대치하기도 했다.

87년 6월 18일 김해 인제대학생들의 시위를 전한 <인제학보>.
◇진주교대·인제대·마산간전도 시위 동참 = 이날 특이한 점은 그동안 전혀 시위가 없었던 진주교대 학생들이 오전 11시 40분부터 본관 앞에서 시위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학생 200여 명이 시위를 벌이자 당황한 학교측은 이날부터 조기방학에 들어가기로 하고 15일부터 20일까지 진행 중이던 기말고사도 중단했다. 추가 시험 여부는 가정통신문을 통해 전달하기로 했다.

또한 김해에서도 그동안 부산 시위에 참여해왔던 인제대생 500여 명이 낮 12시 노천강당에서 비상총회를 열고 시험 거부와 가두시위를 결의했다.

당시 <인제학보>는 "700여 명의 학우가 스크럼을 짜고 김해시 주요 간선도로에서 가두시위를 가졌다. 학교를 출발, 김해시청, 김해백화점(연좌농성), 김해시장, 김해시청(연좌농성), 한일합섬(김해공장)의 경로로 평화시위를 가졌으며…"라고 전하고 있다.

이어 22일에는 창원군 내서읍 용담리에 위치한 마산간호보건전문대학 학생 300여 명도 본관 현관에 모여 "군사정권 물러가라"고 외치며 농성을 벌였다.

이처럼 시위는 점점 중소도시와 도시 외곽으로까지 확산되고 있었다. 87년 6월 18일 미국 <워싱턴포스트>지는 'S. Korea Protests Grow In Provincial Cities'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시위가 지방도시로 확산되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또 <타임>지도 커버스토리를 통해 한국의 6월항쟁 소식을 8쪽에 걸쳐 상세히 전하면서 시위가 이어지고 있는 전국 주요 도시를 지도로 그려 보도했다.(지도 사진 참조)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마·창노동자투쟁위원회' 명의로 배포된 전단 뒷면.

◇6·26 총궐기를 준비하다 = 이런 가운데 6·10에 이어 또 한번의 국민 총궐기일인 '6·26 국민평화대행진'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결전'을 하루 앞둔 25일 노동자들의 조직적 항쟁 참여를 촉구하는 유인물이 마산시내에 배포된다.

= 이런 가운데 6·10에 이어 또 한번의 국민 총궐기일인 '6·26 국민평화대행진'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결전'을 하루 앞둔 25일 노동자들의 조직적 항쟁 참여를 촉구하는 유인물이 마산시내에 배포된다.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마·창노동자투쟁위원회' 명의로 된 이 유인물은 "14만 마창노동자 여러분!…현 정권이 버티고 있는 것은 우리 노동자들이 이 나라의 민주화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라며, "첫째 : 현장에서 당하는 불이익에 대하여 과감히 맞서 싸워야 한다. 둘째 : 우리의 권익을 찾기 위해서는 각자의 공장에서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셋째 : 공개적인 정치집회에 적극 참가하여야 한다"는 투쟁지침을 전하고 있다. 또 6·26 국민대행진 계획을 전하면서 "이날 회사에서는 강제잔업을 시킬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 잔업을 거부하고 대행진에 적극 참가하여 흔들거리는 군부독재정권을 끝장내고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건설하자"며 '민주정부 수립하여 8시간 노동제 쟁취하자' '강철같이 단결하여 노조를 결성하자'는 등 11개의 구호로 맺고 있다.

이같은 마창노동자투쟁위원회의 유인물은 6월항쟁 이후 전국 노동현장으로 번진 '7·8·9 노동자대투쟁'을 예고하는 것과 같았다.

이런 가운데 마산·창원과 진주 외에 거창과 김해·진해에서도 6·26대행진이 준비되고 있었다. 당시 경남본부와 거창지역 민주단체들이 제작·배포한 전단에는 '국민행동요령'으로 △모든 국민은 태극기 또는 손수건을 흔들면서 집결장소에 모입시다 △오후 6시 국기하강식과 동시에 애국가를 제창하며, 전국의 교회와 사찰은 타종하고 모든 차량은 경적을 울립시다 △모든 노동자·직장인들은 오후 6시가 되면 잔업을 거부하고 평화대행진에 참가합시다 △최루탄 발사를 강력히 저지합시다.(예 : 우~ 함성 지르기, 무탄무석 비폭력 등 구호 외치기) △밤 10시 국민불복종의 표시로 10분간 소등합시다 라고 권유하고 있다.

◇군부 개입 가능성 보도 눈길 = 마침내 26일 아침이 밝았다. 당일 <경남신문>의 1면 머리 기사는 '여야, 대행진 저지·강행 총력'이었다. 이채로운 것은 머리 기사 아래에 가로로 편집된 "대행진 악화되면 군부 개입 가능성"이라는 기사였다. <연합통신>이 '서방 외교소식통'의 말을 전한 형식의 기사는 이랬다.

<타임>지에 보도된 전국 주요 시위발생지역. 경남에서는 진주와 마산이 분명하게 표기돼 있다.

"한국군 장성들은 현재의 소요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무장군인이 거리를 순찰하게 될 지도 모를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고 서방 외교소식통이 25일 말했다. 이 소식통들은 소요를 종식시키기 위한 정치개혁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전두환 대통령과 김영삼 총재간의 영수회담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26일의 전국적인 평화대행진이 군부의 개입을 초래할 가능성이 제기됐다고 전했다. 한 소식통은 그러나 '많은 군인들은 그같은 가능성을 두려움을 갖고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계엄령이 전 대통령의 평화적 권력이양 희망을 무산시키고 88 서울올림픽을 무산시킬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해왔다. 소식통들은 군부지도자들은 계엄령이 81년 1월 마지막 계엄령 해제 이래 엄청난 경제발전을 이룩해온 한국에서 보다 큰 발언권을 추구하고 있는 중산층의 반발을 초래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소식통은 전경들은 이제 기진맥진했다고 말하고 이들이 26일 평화대행진에서 최후저지선 뒤로 밀릴 경우 '정부는 위수령을 내릴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미 국무부는 22일 한국의 시위사태에 군 개입 반대 의사를 천명했으며, 방한했던 시거 미 국무부 차관보는 25일 한국을 떠나면서 가진 회견에서 "전 대통령에게 계엄선포 반대의 뜻을 분명히 전달했다"고 밝혔다.(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80년대 3권, 167쪽)

<경남신문>의 이날 사회면 머리는 '26일 대행진 전국 또 긴장'이었고, 부제는 '권 치안본부장, 불법집회 규정 원천봉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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