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윽한 차 향기 가야에서 왔을까?

중독이 뇌의 '지독한 편견'이라면 음식은 가장 중독성이 강한 아이템이다. 중독이라고 인식하지 못해서 그렇지 음식은 태어날 때부터 뇌로부터 긍정적 '편견'을 받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입은 도구일 뿐 뇌로 먹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정한 음식에 대한 뇌의 '편견'을 살찌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 음식에 대한 뇌의 작용을 풍부하게 하는 일이다.

뇌를 건강하게 살찌우는데 5명의 전문가가 동참했다. 경남대 김현아 교수(단체 급식), 창원대 이경혜 교수(아동 영양), 창원전문대 김종현 교수(한방 음식), 마산대학 이장환 교수(소믈리에), 경남대 김명자 강사(차) 등 5명의 분야별 전문가가 돌아가면서 단맛, 쓴맛, 신맛, 매운맛, 짠맛이 버무려진 맛난 음식이야기를 들려줄 예정이다.

중국 동한(東漢) 시대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 의하면 중국의 전설시대에 신농(神農) 씨가 하루에 72가지 풀과 나뭇잎을 씹어 보고 맛보다가 중독이 되었으나 차로써 이것을 풀었다고 한다. 그 뒤로 신농은 사람들에게 차를 마시도록 권하였다고 한다. 이후 차는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왕실이나 귀족들의 울타리를 벗어나 일반 백성에게까지 널리 사랑을 받게 되었다.

◇ 중국엔 서기 1세기 전쯤 차 마시는 인물 있었다

중국은 서기 1세기 전쯤 차 마시기를 즐기는 실재 인물이 등장한다. 한나라 선제(宣帝) 때 왕포(王褒)라는 사람이 어떤 과부로부터 노비를 사들이면서 작성한 '동약( 約)'이라는 문서에 편료(便了)라는 직책의 노비가 한 명 들어 있다.

이 편료가 바로 차를 끓이는 역할을 맡았던 노비였던 것이다.

그러나 5세기 무렵까지만 해도 중국의 남쪽에서는 차를 즐겨 마셨지만 북쪽에서는 아직 차 마시는 것을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중국의 남북조시대 북위(北魏)의 팽성왕(彭城王)은 유호(劉鎬)가 남제(南齊)에서 귀순한 왕숙(王肅)에게 물 대신 차 마시기를 즐기자, "임금이나 재상이 즐기는 진미 요리를 마다하고 하인들처럼 물이나 마시다니…" 하면서 비웃었다.

남북조시대를 마감하고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 때는 문제(文帝)가 그를 괴롭힌 두통을 차를 마셔 해결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수나라가 차 문화 보급에 공헌하게 된 것은 운하를 대대적으로 건설하여 남쪽 지방의 차를 북쪽으로 손쉽게 운반할 수 있게 한 데 있다. 그러나 중국 차에 대한 최초 문헌은 <시경(詩經)> '국풍(國風)' 중 '패풍( 風)'에 나오는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誰謂苦 그 누가 차를 쓰다 하던가, 其甘如薺 냉이처럼 달고도 단데."

사람에 따라서는 여기에서 '다(茶)'를 '씀바귀 도'로 읽기도 하나 <강희자전(康熙字典)>에서는 다( ) 자를 가리켜 '옛날에는 다( )라 하였으나 오늘에는 茶라 한다'고 하여 다( )가 차 다(茶) 자의 옛 글자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을 비롯한 각 나라가 '茶'를 '차'나 '다'로 읽는다. 이는 중국의 차가 중국 내나 다른 나라로 전파되어 간 루트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중국의 수출 창구가 광동(廣東)이었는지 아니면 복건(福建)이었는지에 따라서 광동사투리식 이름을 갖게 되기도 하고 복건사투리식 이름을 갖게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 '다'는 수준 높고 '차'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중국과 비교적 교역이 활발했던 우리나라는 '茶'를 광동어 계통의 차(Cha)나 복건어 계통의 다(Tay)를 혼용하여 쓰고 있다.

예를 들어 '茶'라는 글자를 찻집, 차례(茶禮), 차시(茶匙), 차마고도(茶馬古道)라고 부르는가 하면 다도(茶道), 다방(茶房), 다식(茶食), 다구(茶具) 등으로도 부른다.

우리나라의 옛 문헌에서도 차와 다는 혼용되어 쓰였다. 고려시대 손목이 편찬한 <계림유사>에서는 고려어를 중국 자음(字音)으로 기록한 가운데 '茶戌'이라고 해 '차술'로 읽은 기록이 있으며, <월인천강지곡>(1447년)에는 '가루다(迦 茶), 가룹따'라고 썼고, <월인석보>(1458년)에서는 '가차(伽茶), 가짜'라 하여 차와 다가 같이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6세기에 편찬된 <훈몽자회>에서는 '茶, 차다'라 하여 '茶'의 훈은 '차'이고 음은 '다'임을 알 수 있다.

'茶'가 같은 한자에서 나는 두 음가(音價)임에도 흔히 '다'라고 하면 수준이 높고 '차'라고 하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다'는 한자고 '차'는 우리말이라는 잘못된 상식을 가진 사람도 있다.

그러나 광동어 '차'와 복건어 '다'를 우리가 혼용하여 쓰고 있을 뿐이지 다른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논리가 장황하면 오히려 그 근거도 빈약해지고 설득력도 떨어지게 마련이다.

◇ 우리나라엔 어떻게 차가 생겨났을까?

우리 차의 유래에 관하여는 중국 도입설, 인도 전래설, 자생설 등의 세 가지 학설이 있다.

중국 도입설은 우리나라 차 유래에 관련된 최초의 문헌인 <삼국사기>로,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828년)에 김대렴(金大廉)이 당나라로부터 차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게 했다. 차는 선덕왕(632~647년) 때부터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성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인도 전래설은 일연(1206~1286) 스님의 <삼국유사>에 전재된 김양감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따르면 "김수로왕의 왕비가 된 아유타국(지금의 인도) 공주 허왕옥이 서기 48년 음력 5월 배를 타고 고국을 떠나서 그해 7월 27일 김해의 별진포에 상륙하였다. 허 공주의 수행원이 20여 명이었고, 혼수품으로 금·은·패물·비단과 함께 차종자(茶 種子)를 가지고 왔었다"라고 돼 있다.

자생설로는 우리의 토양과 기후 등의 조건을 고려할 때 우리 땅에서 차나무 원종(原種) 이 훨씬 이전에 자생했으리라는 학설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가야 고분에서 출토되는 토기로 된 차 도구, 고려시대의 팔관회 등에 대한 기록과 아직도 설이나 추석 때 드리는 '차례' 등에서 우리의 차 역사가 전혀 얕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차나무 자생지는 조엽수림(동백나무 등과 같이 잎에서 광택이 나는 활엽수) 지대와 일치한다. 아시아에서 조엽수림 지대는 인도 북동부의 아샘지역에서 중국의 남부와 우리나라의 남부, 일본의 남부에 걸쳐 있다.

◇삼우당 김명자 씨는 누구?

△원광대학교 차문화학과 재학 중
△(사)한국차인연합회 다도대학원 수료
△현재 김해 다례원 원장

그래서 차나무는 인류의 탄생 이전인 신생대 초기에 이미 이 지역에 폭넓게 분포하고 있었다는 것이 최신의 학설이다. 또한, 우리나라 영호남지역 각지에도 야생 토종 차가 자생하고 있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지고 있으므로 우리 차의 자생설이 훨씬 더 과학적으로 설득력이 있지 않나 추측해 본다.

/김명자(김해 다례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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