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삶 다독이는 따끈한 '경남의 정(情)'많은 사람 먹을 수 있어 1950∼60년대 서민음식

우리 조상은 고기 하면 쇠고기를 일컬을 정도로 쇠고기는 귀하게 여겨 무려 120여 가지로 세분해서 조리해 먹었다. 그러나 돼지고기는 비계가 많이 붙어 기름기가 많다 하여 미각 문화가 늦게 발달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그 선입견은 계속되고 있다.

밀양 5일장서 인기 얻어 부산 · 경남 지역 별미로

양반 계층에서 주로 쇠고기를 선호하고 돼지고기는 돈 없는 일반 서민들이 즐겨 먹는 고기인지라 고 요리서에도 쇠고기에 비해 돼지고기 조리법이 많지가 않다. 그러나 중국 청대(淸代)의 식육(食肉)은 거의 돼지고기 일색이다. 물론 1600년대 우리나라 요리서인 <음식디미방>, <주방문(酒方文)>에 돼지고기 요리법이 있으나 매우 적다. 다만, 1700년대 중엽에 발간된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 비교적 독자적인 돼지고기 요리법이 등장한다. 그런데 지금은 돼지고기 소비량이 쇠고기 소비량 못지 않게 많아졌다. 그 이유는 쇠고기 값이 비싼 이유도 있지만 돼지고기의 특정 부위라 할 수 있는 삼겹살 때문이다.

◇삼겹살이 아니라 세겹살 = 몇 년 전 한냉 차상엽 회장과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 자리에서 돼지고기의 정육 소비 문제에 대해 염려를 하며 맛있는 요리로 개발하여 삼겹살 못지 않은 소비를 촉진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삼겹살도 우리말 어순에 맞지가 않는다. 우리말에서 한 겹, 두 겹, 세 겹이라고 하지 일 겹, 이 겹, 삼 겹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물론 1980년대 초반까지는 삼겹살이라 하지 않고 세겹살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대부분 삼겹살이라고 일반화되어 부르니 94년 국어사전에 '비계와 살이 세 겹으로 돼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돼지고기'라고 정의되어 등록했다고 한다. 이 삼겹살이 서양에서는 훈제하여 베이컨(bacon) 즉 베이컨용 고기라는 뜻으로 불리고 있다.

어쨌든 삼겹살을 즐기는 소비자가 늘어나면서 돼지고기 총 소비량도 증가하고 있으나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돼지고기는 일반 서민들이 즐겨 먹는 고기였다.

필자가 어렸을 적만 해도 농촌의 집 대부분이 돼지 한두 마리 정도는 집안에서 나오는 음식물(남은 밥이나 곡물 겨)을 먹여 사육하다가 대소사가 있을 때 돼지를 잡았다.

지금은 밀도살이 금지되어 도축장에서만 돼지를 잡았지만 예전에는 마을에 돼지를 잡거나 마을의 대소사에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이 있어, 돼지를 잡아 마을 각 집에서 추렴하여 몇 근씩 떼어가고 내장이나 머리 족 등은 돼지를 도살하는 사람에게 품삯으로 주었던 것이다.

가끔 동네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리고 이런 날에는 어른들이 그렇게 야단을 쳐도 아이들이 모여 구경하다 돼지 오줌보를 얻어 그 속에 물을 넣고 축구를 하기도 했다.

곡식, 채식을 주로 하던 일반 서민들이 단백질이나 지방 섭취에 제일 좋은 것이 돼지고기다. 돼지고기 한 두어 근을 사다가 대가족이 함께 사는 가정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는 국물을 많이 잡는 돼지국밥이 있다.

1950~60년대는 가정뿐만 아니라 군대에서도 일주일에 한 번씩 돼지고기를 넣고 국을 끓이는데, 큰 국통에 돼지고기 살은 가라앉아 보이지 않고 비계만 둥둥 떠 있지만, 이 돼지고기 비계라도 한 두점 배식 받으면 '왕거미' 건졌다 하여 기분 좋아했다

이렇게 돼지국밥은 국물을 많이 잡아 여러 사람이 함께 나눠 먹을 수 있어 식구가 많은 가정과 군대는 물론 농촌에서 농번기에 일꾼들에게 제공하는 두레 음식에도 자주 등장하는 음식 중의 하나다.

◇경남에서만 장사 되는 밀양돼지국밥 = 아마 두레 음식 중 대표적인 음식이 논두렁이나 밭두렁에 걸터앉아 여럿이 나눠 먹기에 편리한 비빔밥과 돼지국밥일 것이다.

이 돼지국밥이 문화적 수준이 높아지고 경제가 성장하면서 서서히 사라지고 삼겹살 등 구이 문화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수십 년 전 밀양 무안면 재래시장 5일장의 돼지국밥은 장꾼들에게 인기 있는 장터 음식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재래시장 안에 '시장옥'은 원래 정육점을 겸하고 있었는데, 이 집에서 끓여내는 돼지국밥은 두레 음식으로 익숙해진 시골 사람들에게는 아주 훌륭한 요깃거리였다.

인근 농촌에서 장을 보러 나온 촌부나 이 장 저 장 떠돌아다니는 상인들이 10원을 주면 돼지고기 비계가 붙은 고기가 듬뿍 든 국밥 한 그릇과 막걸리 한 사발로 허기를 채우고 농촌의 힘들고 고단한 시름을 달랬던 무안면민들의 애환이 깃든 음식이 바로 돼지국밥이다.

필자가 '시장옥'에 취재를 간 지도 벌써 10년이 되었다. 당시는 김우근(83) 할머니가 시어머니로부터 그 손맛을 이어받아 '무안 식육식당'이라는 이름으로 상호 변경을 하여 돼지국밥을 팔고 있었다. 지금은 3대 며느리인 김소득 아주머니가 '무안 식육식당'을 물려받아 맛을 이어오고 있으며, 작은아들은 '동부식육식당'이라는 가게를 개업해 돼지국밥을 끓여 팔고 있다.

밀양시 무안면에서 시작된 돼지국밥집은 경남 전역에 경남 사람들이 즐겨 먹는 대중 음식으로 자리하게 되었고, 밀양 무안의 돼지국밥을 상징이나 하듯 '밀양돼지국밥집'이라는 상호로 장사하는 집들이 많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 돼지국밥집이 경상도 특히 부산, 경남에서만 장사가 된다는 것이다.

부산, 경남 이외 지역에서 돼지국밥집 문을 열면 얼마 못 가 문을 닫는다. 서울 종로구 안국동 지하철 역 출구 주유소 근방에도 돼지국밥집이 있어 필자도 가끔 가서 먹기도 했는데, 장사가 안 되는지 얼마 안 가 문을 닫았다.

그러나 마산은 역 부근은 물론 합성동에 이르기까지 돼지국밥집이 성업 중이다.

국물이 뽀얗게 우러난 돼지국밥 투가리에 비계 살이 붙은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 있고, 새우젓으로 간을 한 후 경상도 말로 '정구지'라 부르는 부추 겉절이를 넣고 먹는 맛의 진득함은 안 먹어 본 사람은 느낄 수 없는 감칠맛이 있다.

/김영복(경남대 전통식생활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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