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낳기 직전인 겨울철 그 맛이 매우 좋아 조선시대 왕들이 즐겨먹었던 복백탕

◇한·중·일에서 인기 높았던 '황복' = 황복은 복숭아꽃이 피는 춘삼월에 알을 낳으려고 바닥에 자갈이 깔린 강으로 올라와 음력 4~5월에 알을 낳는다. 부화한 새끼는 다시 바다로 나가서 자란다. 그래서 알을 낳기 전인 늦가을에서 초봄까지인 겨울철에 복어의 맛이 제일 좋다. 매년 이때쯤이면 산란을 위해 서해에서 임진강으로 황복이 올라온다.

서유구의 <난호어목지>와 <전어지>의 황복에 대한 기록을 보면 "복(河豚)은 몸뚱이가 좁고 배가 부르며 입은 작고 꼬리는 가늘다. 이가 있고 배 지느러미가 없다. 등은 까만 청색이고 노란 무늬가 있으며 배 밑이 하얗지만 광택이 없다. 건드리면 화를 내며 몸통이 부풀어 올라 물 위에 뜨는 까닭에 분어(噴魚), 기포어(氣包魚), 취토어(吹吐魚) 등으로 부른다. 황복이 강에 와서 있다가 한식 뒤에 복숭아꽃이 피면 독이 있어서 먹지 못한다"라고 씌어 있다.

산란하기 전의 황복 맛이 최고조에 달했으나 독이 있어 복을 먹고 죽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일본은 1945년부터 1975년까지 무려 2500명 정도가 복요리를 먹고 사망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복요리를 먹고 중독이 되면 마당 돌리기라고 해서 한쪽 옆구리에 복 중독된 사람의 목을 끼고 마당을 돌면서 이마를 손으로 쳐 잠을 못 자게 하여 중독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죽는 줄 알면서도 복어의 맛에 이끌리어 다시 찾게 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보면 3월 시식(時食)으로 "복사꽃이 떨어지기 전 하돈(河豚: 강에서 잡는 복)에 파란 미나리와 기름과 간장을 섞어 국을 끓이면 그 맛이 진기하다"라고 기록되었다. 특히 황복 부위 중에 복부 불룩한 아랫부분이 제일 맛이 있다.

중국에서는 최고로 맛있다는 형용사로서 오 나라 임금 부차(夫差)를 현혹시킨 절세미인 서시(西施)의 이름을 붙여 표현하는데, 복어의 불룩한 아랫부분을 이 여인의 젖과 같이 맛있다 하여 '서시유(西施乳)'라고 부른다. 황복은 어느 부분 가릴 것 없이 쫀득쫀득한 맛이어서 모든 부분을 서시유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그래서 중국의 유명한 '적벽부(赤壁賦)'를 읊은 시인 소동파(蘇東坡)는 "복어의 맛은 가히 목숨과도 바꿀만한 가치가 있다"라고 극찬을 했다.

◇조선 왕들이 좋아했던 '복백탕' = 조선의 5대 왕 문종(文宗)은 재위기간이 2년 3개월로 비교적 짧은 기간 보위에 올랐으나 세자(世子)를 무려 29년이나 지냈다. 효자(孝子)로 알려졌던 문종은 세자 시절 소갈병(당뇨병)에 걸린 부왕(父王) 세종(世宗)에게 아침 문안을 갈 때마다 동궁(東宮) 수라간에서 세자 내외가 직접 복백탕(鰒白湯)을 끓여 올렸다고 한다.

1600년경 정재륜(鄭載崙)이 쓴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에 보면 "인조(仁祖)도 복어를 즐겨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옛날에 우리의 강촌(江村)에서는 복을 잡으면 내장을 모두 긁어내고 초가집 처마 끝에 매달아 놓았다가 명태처럼 마르면 보관해 두고, 노인들이 팔다리가 쑤시는 관절통이 오면 된장을 풀어 복 된장국을 끓여 먹고 겨울철 기나긴 밤에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고 한다.

빙허각의 가정 백과인 <규합총서(閨閤叢書)>에 보면 "복어는 그 독이 지독하나 옛날부터 맛 좋기로 이름났으니 아니 먹을 수가 없다. 복을 끓일 때 부엌의 그을음이 떨어지는 것을 크게 꺼리니 뜰에서 끓이고, 복을 먹고 나서 숭늉을 마시는 것을 크게 꺼린다. 그리고 곤쟁이 젓이 복어 독을 푸는데 좋다고 했다"고 기록되었다.

그리고 복엇국 끓이는 방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핏줄이 가로세로 있으니 칼로 긁어 꼼꼼히 보아 실오라기만 한 것도 남기지 말고 다 없앤 다음, 여러 번 씻어 등과 배에 피의 흔적이 없이 하되 살결은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노구 솥에 백반 작은 조각과 기름을 많이 붓고 장과 미나리를 넣어 끓인다. 복어의 이리(魚白)는 본디 독이 없으니 생선 배에 넣고 실로 동여 뭉근한 불에 두어 시간 끓인다." 이렇게 끓인 복엇국은 식어도 버리지 않는 것이 이상한 노릇이라고 부연했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가진 우리의 복어요리가 복요리 전문점에 가면 일본에서 건너온 음식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키게 할 정도로 메뉴판에 일본명과 한국명을 혼용해 쓰여 있다. 즉 복백탕(복 맑은 국)이 복지리, 복 토렴이 복 샤부샤부로, 복 회가 복 사시미로 쓰여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본의 복지리는 건더기는 먹지만 국물을 먹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건더기와 국물을 모두 먹는다. 사실 복백탕은 일본 음식이기보다 순수한 우리의 전통 음식이다.

◇복 요리는 엄연한 한국 전통 음식…'일본 유래설' 거짓 = 부산 다대포에 일본강점기 이전부터 해방 이후까지 <진주집>이라는 유명한 복집이 있었다. 이 집에서 바로 복국이라는 이름의 복백탕을 끓여 팔았다.

그러나 부산에 일본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복 사시미'라는 '복어 회'가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어느덧 우리의 전통적인 복백탕도 그들에 의해 '복 지리'라는 이름으로 둔갑했다.

그러나 '지리(ちり)'란 '찌개'가 아니고 '탕(湯)'이다. 음식점에 가면 '대구지리'나 '복지리' 이런 메뉴판을 흔히 볼 수 있다. 고춧가루를 넣어 얼큰하게 끓인 생선국을 '매운탕'이라 하는데 비하여, 고춧가루를 쓰지 않은 생선탕을 '지리'라고 부른다. 굳이 우리의 고운 말과 글을 두고 '지리(ちり)'라는 외래어를 사용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복백탕((鰒白湯): 복 맑은 탕)이 일본에서 유래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지 아니면 자기 집 분위기가 왜색(倭色)이 짙어야 매출이 많이 오르는 건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우선 전자라면 바르게 알아야 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어느 책에서는 '지리'를 대신할 우리말로 '백숙(白熟)'을 예로 들었는데, 양념하지 않은 채로 곧 하얗게 익혔다는 뜻으로 표현한 것 같다. 하지만 '지리(ちり)'를 '대구백숙'이나 '복 백숙'이라고 하는 것은 적당치 않다. 우리의 가열 동사에서 '삶다'와 '끓이다'는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백숙'은 삶는 것이며, '복지리'라 불리는 것은 끓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맑은 탕'이다. 물론 맑은 국(羹)이라고 해도 무난할 것 같다.

<규합총서> 등 고 요리서(古 料理書)나 조선시대 문헌에도 복백탕 끓이는 법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복 맑은 국'은 일본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즐겨 먹었던 우리 전통음식의 하나다. 오히려 일본은 복어탕의 국물은 먹지 않는다. 이제 복요리에서도 우리의 음식명을 찾아야겠다.

일본에서는 복어 독(테트로도톡신)을 이용해 마취제를 개발하기도 한다는데, 복어 독을 제거한 후 남는 미량의 복어 독은 오히려 술 해독에 좋다고 한다. 숙취 해소에 좋은 복어의 테트로도톡신, 콩나물의 아스파라긴산, 미나리는 복어 독의 중화 작용과 간 해독, 황달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김해 '일송생복정'·마산 '남성식당' 복국 유명 = 옛날 우리 조상은 복을 잡아 처마 끝에 매달아 놓고 꾸둑꾸둑하게 마르면 미나리, 콩나물과 함께 넣고 된장을 풀어 먹고 긴긴 겨울밤 삭신이 쑤시는 관절염의 고통을 이겼다고도 한다.

김해 '일송생복정(김해시 어방동 1089-14, 전화 055-322-8921~2)'이 이러한 전통적인 방법으로 복 된장국을 끓인다. 그러나 복국 하면 뭐니뭐니해도 마산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마산의 1960~70년대 언론인 고 김형윤 선생이 쓴 <마산야화(馬山野話)>에 보면 마산의 미각(味覺)이 나온다. 이 책에 보면 '버들다리거리 석태네 집 복국과 창원집 생선국 맛을 술꾼들이 비위를 맞추어 주는 곳이었으나 이들도 세상을 떠나 다시는 그 맛을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마산에는 오동동 어시장 일대 복국 거리에 '남성식당'을 비롯해 복집이 무려 27군데가 있고, 생선국을 파는 집들도 여러 곳 있어 어시장을 찾는 식도락가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있다. '남성식당'은 복국을 3대(김승길: 마산시 오동동 251-79, 전화 055-246-1856)에 걸쳐 이어오고 있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소문을 듣고 찾아 와 복국을 먹고 갔다고 한다.

/김영복(경남대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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