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기로 이어지는 현대사 뒤틀린 역사 펴는 날 희망품기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앞에 나서지 마라’
한국의 보편적인 사람들이 어렸을 때부터 부모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일 것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철저히 체제순응적 인간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가 수천 수백년간 지속돼 왔기 때문이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지난 2월 <한겨레21 designtimesp=10835>에서 “단 한번도 왕의 목을 치지 못한…조선시대부터 거듭 놓쳐버린 개혁의 기회가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보수성을 낳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멀리 조선시대까지 올라가지 않더라도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 현대사는 우리 국민에게 체념과 침묵만을 강요해왔다. 침묵을 깨고 ‘앞에 나선’ 사람들은 목숨까지 내놓아야 했다.
해방 후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기간동안 국가권력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의 숫자가 110만명에 이른다는 소장학자들의 주장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이나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 맞먹을 정도로 끔찍하다. 현대사는 권력의 야만과 광기에 의한 학살의 역사요, 한국의 산하는 이들 피학살자의 시체로 뒤덮힌 거대한 무덤이었던 것이다.
이런 무시무시한 공포의 세월은 이땅의 부모들로 하여금 자식에게 ‘기회주의적인 삶’을 교육하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국가의 폭력으로부터 자식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이었다.
일제시대엔 친일, 해방직후엔 친미, 정부수립 이후엔 친독재가 한국사회의 주류기득권을 형성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숱한 역사의 전환기가 있었지만 이들 중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친일파와 부왜역적은 해방직후 재빨리 미 군정에 빌붙어 극우세력이 됐고, 이들은 고스란히 이승만 독재의 앞잡이가 됐다.
3.15와 4.19로 잠시 위기를 맞는 이들 극우세력은 1년만에 총칼과 탱크를 앞세운 5.16쿠데타와 함께 화려하게 부활한다. 그후 박정희의 죽음과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끄떡없이 지배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3.4.5.6공 정권 치하의 친여.관변 인사들이 현 정권 아래에서도 제2건국위원회 등 관변단체 간부와 위원직을 변함없이 장악하고 있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98년 5월부터 2년이 넘는 기간동안 연재해온 <지역사 다시읽기 designtimesp=10844>에서도 우리는 이처럼 뒤틀린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일제 말기 대표적인 친일인사가 해방후에도 언론.정치.행정의 수장이 되어 지역사회를 주물렀는가 하면, 일제의 경찰이 해방된 조국에서도 경찰이 되어 50년대 민간인 학살에 앞장서는 모습을 생생히 지켜봐야 했다.
또한 이들은 그후에도 일제 부역과 민간인 학살의 책임을 지기는커녕 60년 3.15부정선거에 앞장서면서 이에 항거하는 마산시민들의 가슴을 향해 총을 쏘았다. 당시 지역경제를 주무르던 기업인들도 부패한 권력에 정치자금을 대면서 거대재벌로 변신해 나갔다. 4.19직후 수사과정에서 밝혀진 정경유착 기업들의 명단이 지금의 재벌기업들과 그대로 일치하는 것은 그냥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경찰이나 기업인.정치인.관료 뿐이 아니었다. 문화예술인들마저 독재권력의 편에 서서 민중을 현혹하는 데 앞장섰다. 마산의 대표적인 문인 이은상은 친일잡지 <조광 designtimesp=10848>의 주간을 거쳐 이승만 정권의 ‘문인유세단’으로 전국을 누볐고, 5.16쿠데타 이후에는 박정희 정권의 문화정책 자문역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곡학아세의 전범을 보였다.
그를 계승한 지역사회의 문화예술인들은 5공 시절 전두환의 4.13호헌조치 지지성명에 앞다퉈 이름을 올렸고, 이은상을 3.15의거정신에 맞서는 마산의 정신문화로 뿌리내리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마산시민의 날 시민축제의 이름은 이은상의 노래제목을 딴 ‘가고파대축제’가 되었고, 이은상이 어릴 적 살던 마을과 도로는 그의 호를 딴 ‘노산동’‘노산로’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 3.15의거정신을 기리기 위한 ‘항쟁의 거리’는 어디에도 없다. 또한 이은상이 어릴 적 물을 길어먹었다는 우물은 ‘은상이 샘’이 되어 마산시에 의해 ‘3.15기념비’와 나란히 영구보존되고 있다. 바야흐로 이승만을 옹립하려던 이은상과 그의 폭정에 항거한 마산시민이 동격으로 자리매김된 순간이다.
엄연한 역사를 은폐하고 왜곡하려는 시도도 끊이지 않았다. 60년 3.15의거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시 예산으로 발간한 <마산시사 자료집 designtimesp=10852>은 한 세도가의 입깁에 의해 모조리 불태워졌다. 이른바 ‘마산판 분서갱유사건’이다.
미 군정의 실정에 항의해 궐귀했던 46년 10월봉기는 적어도 수십명에 이르는 시위대가 목숨을 잃은 역사적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마산의 모든 역사 기록물에서 사라져버렸다.
해방직후 자주적 민족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자발적으로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에 대한 모든 기록이 말소돼 버린 것도 마찬가지다.
더 경악할 일은 1950년 7월 15일부터 8월 중순 사이 마산에서만 1681명의 비무장 민간인을 재판도 없이 잔혹하게 학살.수장한 집단학살(genocide)사건도 <마산시사 designtimesp=10856>를 비롯한 공식기록물에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런 역사의 범죄자들이 지금까지 지역의 지배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단 한번도 정의를 바로세우지 못해본 사회, 단 한번도 역사의 범죄를 단죄해보지 못한 국가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정의’를 가르치기를 바라는 것은 허황된 욕심일 뿐이다.
<지역사 다시읽기 designtimesp=10860>는 79년 부마항쟁에서 마무리되지만, ‘지역사 바로세우기’는 <경남도민일보 designtimesp= 10861>가존재하는 한 계속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P>< /P>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