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도민일보 7월 23일자 조찬용씨의 <전제는 과단성있는 인물이었다>라는 글에서 선조실록의 글을 본인이 잘못 해석하였다고 하셨는데, 본인은 경남 모 대학의 국사학과 교수이고 문학박사이신 분이 해석한 글이니 틀림없다고 본다. 전제가 부하의 목숨을 아껴 도원수 권율의 진격 명령을 거부하였다는 대목은 조찬용씨의 아전인수적인 확대해석을 한 창작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조찬용씨는 정사(正史)인 실록이 가장 정확하다고 주장하는데, 그 당시 한양의 궁내에서 기록을 담당한 사관이 지방에서 있던 일을 일일이 자기 눈을 보고 기록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고, 그들에게 제공된 정보에 오류 절대로 없다는 주장에는 찬동할 수 없다. 그보다도 그 당시 쟁쟁한 문필가들이 쓴 기록에 이사종(李士宗)에게 독살당했다는 기록과, 또 이사종에게 칼을 맞고 죽었다는 기록, 그리고 이사종에게 도망을 다녔다는 무고를 당하여 처형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찬용씨는 전제가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에 영산현감이 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다고 주장하였는데, 역사에 있어서 그랬을 것이라는 상상은 금물이라고 본다. 임진왜란 초기에 부산진성의 정발(鄭潑), 다대포진의 윤흥신,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자리를 지켜 일본군과 싸워 전사하였고, 경상좌수사 박홍(朴泓)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을 비롯한 군수와 현감들은 일본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전부 달아났다.(慶尙左水使朴泓, 卽棄城退走, 慶州倭分兵陷西生浦, 多大浦 僉使 尹興信, 拒戰死之, 沿岸郡縣鎭堡, 望風奔壞 <조선왕조선조수정실록>) 그러나 아군보다 수천배 우세한 일본군과 싸울 수 없어 군수와 현감 등이 삼십육계하였다는 것은 병법을 안 현명한 행동이라고 본다.
그리고 조찬용씨가 화왕산성 전투가 없었다고 시인하시는데, 영산에 화왕산성 승전을 기념한 조형물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런지 조찬용씨의 의견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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