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화님께서 필자에게 재질의한 19일자 기고를 잘 보았다. 화왕산에서 왜적과 상호 농성 및 기세 싸움 등은 있었으나 실제적 전투는 없었고, 전제장군 충절비는 미화되었다는 것은 전에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론이 없다.
다만, 금번 조중화님께서 지적한 조선왕조실록 부문에 대하여는 이번 논쟁 중에서 전제장군의 인간성과 리더십, 애국심, 전투에 대한 혜안 등을 알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부문이기에 다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조중화님은 여기에서 결정적 오류를 범했다. 님께서 인용한 조선왕조실록 권96, 선조31(1598년) 1월 6일(임진)에, “…以徇軍兵不敗不進”의 해석에 결정적 잘못을 범한 것이다. 정확하게 다시 해석하면 “…이렇게 하니(즉, 영산현감 전제 등 3인을 목베니) 군병들이 감히 진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다.
울산전투 부문에 대해서는 “도원수 권율이 직접 진영에 나아가 독전하며 영산현감 전제와 출신 1인과 군정1인을 (목) 베어 조리돌리니, 군병들이 감히 진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왜적의 탄환이 비오듯하여 사상자가 매우 많아 어쩔 수 없이 진(陳)을 물리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실록에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후대에 기록한 전제에 관한 문헌보다는 정사(正史)인 실록이 가장 정확한 기록이다. 이런 기록을 보노라면, 전제는 병법도 모르는 무모한 권율의 공격명령을 과단성있게 거부한 것이다.전제의 항명은 무과 출신으로서의 병법에 대한 박식함과 전력손실을 방지하려는 책임감, 부하사랑, 부당한 명령을 목숨으로 항거한 기개를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더욱 전제장군의 공격거부가 정당했다는 것은 과거 급제자 1인 및 군정 1인도 전제장군과 함께 권율의 공격명령을 거부하여 함께 죽임을 당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하겠다.
만약 전제장군에 대한 이와 같은 기록에 대하여, 본인과 같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주장하면, 본인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실록의 기록에 대해서는 독자들이 더 잘 판단하지 않겠는가.
권율의 인물평에 대하여 사신(사관)이 평가한 것이 조선왕조실록 권105, 선조31년 10월 27일(기묘)에 잘 나와 있다.
이 부문에 대하여 더 이상 논쟁을 벌이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판단된다. 전제장군은 불합리한 명령을 목숨으로 항거한 과단성 있는 인물이었고, 병법에 일가견을 가진 인물이며, 부하를 사랑한 인물이며, 병력손실을 걱정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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