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리는 횟수·가짓수 줄이고 사진으로 대신하기도 하는 풍토 확산

"차표도 없고 시간도 없어서 고향에 못 갔다면 영상통화로라도 차례를 함께 지낸다. 조상님도 좋아하실 것이다!"

모 통신회사의 광고문구다. 디지털식 차례 지내기란 형식으로 휴대전화 화면에는 추석제사상이 차려지고 점잖은 의상으로 정중히 예의를 갖춘다. 이 '추석 필살기' 편은 성우의 해설까지 더해지며 재미와 위트를 선사한다. 조상에 대한 공경심을 위한 제사라는 측면에서 광고의 주인공은 아주 훌륭한 후손이다. 하지만, 조상이 제사에 오른 음식 한번 맛보지 못한다면 분위기는 삭막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주인공도 청주를 한잔 들이켜며 "카~!" 소리를 내고 광고는 끝을 맺는다.

만들 땐 손이 많이 가지만 만들고 나선 젓가락이 멈칫하는 것이 명절(제사) 음식이다. 추석이 끝나면 항상 냉장고에서 자리만 차지하는 것이 보통이다. 또한, 많은 음식물 쓰레기를 유발하기도 하고 억지로 다 먹다가 배탈이 나기도 하는, 먹지도 버리지도 않는 일종의 '계륵'이다. 알게 모르게 피하는 제사 음식. 배부른 자의 여유일까. 맛없는 음식에 대한 배척일까.

   
 
 
◇ 제사 음식, 합리적 선택은?


창원 상남동에 사는 강모(28·여) 씨. 종손인 아버지를 둔 탓에 종가 제사만 1년에 16번을 치른다. 한 달에 한번 이상은 제삿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 빨리 쉬는 나물 때문에 제사가 있으면 며칠간은 하루 세끼 나물비빔밥만 먹어야 한다.

제삿밥이 가장 싫다는 강씨는 제사 안 지내는 집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목표다. 하지만 불행히도(?) 현재 남자친구의 집도 종가 집안이다.

그래서 강씨는 2가지 약속을 다짐받고서야 남자친구의 프러포즈를 허락했다.

약속의 하나는 제사 때 자신이 좋아하는 식단 위주로 음식을 장만하는 것이고, 또 다른 약속은 음식 가짓수를 10가지 이하로 줄인다는 것이다.

강씨는 "조상에게 대접하는 음식을 제가 좋아하는 것만으로 채운다는 게 저 자신도 심하다 싶었지만 제사 음식을 남겨 버리는 것보다 훨씬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창원에 사는 차 모 씨는 이번 추석을 맞는 마음이 가볍다. 지난해까지 직접 차례상을 차렸지만 올해는 재래시장에서 음식을 주문했다. 동서들이 모두 맞벌이인데다가 연로하신 시골 부모님에게 귀찮게 해드리고 싶지도 않았다.

음식 장만으로 말미암은 스트레스 등을 고려한다면 가격도 비싼 편이 아니다. 차씨는 "20만 원 안팎이면 해결되기 때문에 직접 음식을 만드는 것보다 낫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차씨가 가장 마음 놓이는 건 제사가 끝나면 의무적으로 분배해 남은 음식을 가져가야 했던 예전과 달리 싸가지 않아도 될 만큼 소량으로 주문했기 때문이다.

   
 
 
◇ 줄여라 vs 늘려라


재래시장에서 28종류의 4인 가족 제사상 차림은 25만 원 선.

보통 제사상에 올라가는 음식은 28종류다. 나물 5가지, 부침개, 생선 5마리, 전, 유과, 밤, 대추, 각종 과일 등이다.

각종 음식은 한 번씩 집어먹어도 한 끼 식사는 거뜬할 정도로 풍성하다. 그만큼 남는 음식의 양도 늘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보통 5마리를 올리던 생선도 3마리 이하로 줄이고 전도 명태 전만 만들며 부침개도 한 가지만 준비하는 가정이 늘고 있다.

마산 부림 시장 내 먹자골목에서 28년째 제사 음식을 만드는 지순자(54) 씨는 "20년 전만 해도 거의 집에서 만들어 먹던 제사 음식을 10년 전부터는 맞춤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며 "당시엔 푸짐하게 준비해줘도 모자란다는 표정을 짓는 손님도 있었지만 근래 5년 전부터는 서너 사람 분량으로 최대한 음식량을 줄여달라고 하는 손님이 대다수"라고 말했다. 가져가면 먹는 사람도 없고 남겨서 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이유다.

"요즘은 젊은 사람, 나이 든 사람 구분없이 다들 한 끼 먹을 정도만 싸달라고 부탁한다. 배부르게 먹지 못하던 시절과 달리 맛난 음식이 넘쳐나는데 누가 제사 음식에 손을 대겠나. 사실 음식을 파는 우리 집도 제사 음식 다 먹지 못하고 남긴다."

그래서 지씨는 점차 줄어드는 제사 음식에 서운함을 느끼진 않는다.

하지만, 반대의견도 있다.

지씨의 가게 근처 또 다른 가게에서 제사 음식을 주문 배달해주는 주점자(53) 씨는 "음식이 줄어들면 정(情)도 줄어든다"며 제사상의 음식량이 줄어드는 세태를 안타까워했다.

이렇게 계속 음식이 줄어들다간 10년 안에 제사라는 것이 사라질 것 같다는 주씨는 "제사 음식이 맛이 없는 이유로 남는다면 맛있게 만들면 된다"며 "음식에 대한 편견을 깨고자 나름대로 연구해 고기 등을 적절히 섞어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또 "제사가 줄어드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아니라 고생하기 싫어 말하는 핑계"라고 주장했다.

제사 음식 맛 없다고 느껴지는 까닭은…

   
 
  일러스트/서동진 기자 sdj1976@  
 
제사 음식이 남아 버려지는 이유는 손이 잘 가지 않기 때문이다. 제사 음식이 맛이 없다고 느끼는 까닭은 무엇일까.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다음 네 가지가 젓가락을 멈칫하게 한다.

첫째, 옻칠의 강한 향은 음식물 고유의 향을 변형한다. 제사에 사용하는 다기와 제기에 발라진 옻칠은 평소에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 향을 머금고 있다가 음식과 접촉하면서 강한 향을 발산한다. 그래서 음식에 옻칠 향이 배기도 한다.

둘째, 향 냄새 흡수도 중요한 변수다. 갓 지은 밥이나 국, 떡처럼 열을 지닌 음식들은 제사가 진행되는 동안 온도가 내려가면서 주변의 열기와 습기를 흡수하게 된다. 그때 방 안에 가득한 향 냄새는 가장 흡수하기 쉬운 물질 중 하나다.

셋째, 간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의 제사 방식은 현대에 행하는 것보다 제사 진행 시간이 길었다. 그리고 석빙고 같은 냉장공간이 집집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음식물의 부패를 막기 어려웠다. 그래서 제를 치른 음식이 상하는 것을 최대한 늦추려고 간을 맞추지 않거나 최대한 절제했다.

넷째, 먹다 남은(?) 음식. 제사 음식은 조상님에게 대접하고 남은 음식이란 생각 때문에 평소 먹던 음식보다 심리적인 긴장상태에서 먹기 때문이다. 제사 음식을 먹는 사람이 혼령(귀신)이 섭취한 음식물을 받아들이는 것을 자신의 뇌에 좋은 기억으로 인지하기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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