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경남 6월에서 9월까지 항쟁의 기록]⑬ 87년 3월에서 4·13까지

   

2월 7일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이후에도 경남도민의 투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2월 15일 오전 10시에는 민주산악회 마산지부가 무학산 완월폭포에서 50명의 회원들과 민주인사가 참여한 가운데 '살인정권 타도하여 문민정치 구현하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고 박종철 군 추도식'을 열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2월 24일 (주)통일에서는 기관원들과 공장장 등 관리자 수십명이 노동조합 총회소집을 추진중이던 유해춘씨의 사물함을 부수고 서명용지와 노트를 강탈해갔으며 한용덕씨를 구타하고 수명의 노동자들을 회사 내에 밤늦게까지 감금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유해춘씨 등은 비밀리에 회사측과 임금교섭을 벌여온 어용노조에 대해 노조민주화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회사는 유씨와 서모씨 등을 해고했다.

이런 탄압에도 불구하고 (주)통일 해고자들은 <통일노동자신문>을 끊임없이 발행하면서 투쟁을 계속했다. 초기 150부였던 이 신문은 87년 4·5월 500부로 늘어났다고 한다.(김하경, <내사랑 마창노련 상>, 갈무리, 1999)

또 마산수출자유지역의 한국수미다전기에서도 노조 결성 투쟁이 이어지고 있었고, 마산의 택시회사인 금성교통에서도 3월 3일 조합원 50여명이 해고철회 등을 요구하며 파업농성을 벌였다.

87년 4월 시국미사가 열린 거창성당 앞에 전투경찰이 배치되고 있다.
대우중공업 창원공장 노동자 1000여명이 2월 26일 자연발생적으로 기만적인 임금협상에 항의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은 28일 회사의 감시와 협박에 의해 잠시 중단됐으나, 3월 3일부터 자연스럽게 중식거부와 잔업거부로 이어졌다. 이 투쟁은 3월 7일까지 이어졌는데, 6월항쟁 이후 폭발하게 된 7·8·9노동자 대투쟁의 전주곡인 셈이었다.

이처럼 3월 3일은 대우중공업과 금성교통의 투쟁이 있었던 날이기도 하지만, 당시 전두환에게는 대통령 취임 6주년이 되는 날이었고, 민주화운동세력과 국민에게는 박종철군이 고문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한지 49재가 되는 날이었다.

<경남신문> 독재자는 띄우고 국민항쟁은 '불순세력 작태'로 매도

◇87년 3·4월의 언론보도 = 이처럼 여러가지 사건과 의미가 중첩되는 날, 유일한 지역신문이었던 <경남신문>의 1면 머리기사는 뭐였을까. '전 대통령 취임 6돌 치적-내외인사 10만여명 접견-현장 직접 확인 분주한 나날-해외순방 7회·국내출장 11만㎞-청원 6만8천여건 해결'이었다. 신문사의 입장을 전하는 그날의 사설은 뭐였을까. '가두시위 언제까지-3·3 정치대행진의 우려'였다. 주최측이 '고문추방 국민대행진'이라고 명명한 박종철군 49재 행사를 '정치대행진'으로 이름까지 바꿔버린 사설은 "이른바 '3·3대행진'은 정치적 위기감을 부채질하면서 가뜩이나 스산한 국민들의 가슴에 불안한 회오리바람을 몰아붙였다"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대다수 국민들이 안정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일부 불순세력의 작태에 혐오감마저 느끼고 있음을 확인하고 40년 피땀흘려 이룩해온 안정과 번영을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다짐을 분명히 한 바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사회면에는 '대검, 3·3행진 처리지침 시달-행진에 참가해도 처벌-해산명령 불응 모두 연행키로' '학생 가담 적극 저지-문교부, 박군 49재 관련 지시' 등의 협박성 기사가 실렸다. 3·3대회 다음날인 4일자 사회면 머리기사는 '경남대생 전방부대 입소교육 현장을 가다'라는 명패와 함께 '분단의 현실 뼈저리게 느껴'라는 큰 제목이 붙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 국민의 민주화요구를 봉쇄하기 바빴던 이 신문의 기자들은 한달 후인 4월 7일 신문의 날을 맞아 '시일야 방성대곡'으로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의했던 언론인 장지연의 묘소를 참배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또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가 발표된 날의 1면 머리는 '전 대통령 특별담화'라는 명패를 달고 '현행 헌법으로 내년 정부 이양-혼란막게 소모적 개헌논의 지양-정치에도 신진대사 이뤄져야'라는 제목을 겹겹이 달았고, 사회면에는 '전 대통령 특별담화 각계 반응'을 실었는데, '안보·안정 다지는 불가피한 조치'라는 큰제목과 '점진적 민주화 개혁 큰 기대-국력낭비·국론분열 막을 결단'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이 기사에서 국민반응으로 소개된 사람들은 박원근 반공연맹이사장, 홍숙자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 김용대 대한상이군경회장, 김동인 한국노총위원장, 이해랑 예술원장, 조경희 예총회장, 윤한도 민정당 경남도지부 사무국장, 의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김영구 마산지방변호사회 회장 등이었다.

마산 · 창원 · 진주 · 거창서 학생·농민 거리투쟁 나서 경찰과 대치

87년 3월 21일 거창에서 열린 농가부채 보고대회.
◇마산·창원·진주, 그리고 거창에서 = 정부와 언론의 이런 '일심동체' 속에서도 3월 3일 고문추방 국민대행진의 날은 밝았다. 진주의 경우 경상대 민주광장에서 '고 박종철군 49재 추모대회'가 열렸다. 고문 추방 등의 구호를 내걸고 묵념을 시작으로 거행된 추모대회는 총학생회장의 분향과 부회장의 추모사, 그리고 사회부장의 고문살인 경과보고 등의 순서로 진행돼 총여학생회 회장의 추모사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추모식 이후 250여명의 학생이 전경들과 1시간 정도 대치하였으나 경찰의 저지선을 뚫지 못했다.

마산의 경우 경남대 10·18광장에서 '고 박종철군 49재 및 고문종식 결의 실천대회'가 열렸다. 100여명이 참석한 대회는 추모 묵념과 경과보고, 민노래 제창, 제5공화국 고문사례 발표, 추도시 낭송, 성명서 및 결의문 채택으로 진행됐다. 학생들은 집회을 마친 후 교문 밖으로 진출, 마산∼충무간 국도를 차단하고 시위를 벌였으나 최루탄 쏘며 진압해오는 경찰에 밀려 교문 앞에서 격렬한 투석전이 벌어졌다.

또 창원대에서도 200여명의 학생이 '고 박종철군 49재 추모제'를 열었다.

경남대생들은 3월 16일에도 10·18광장에서 1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제27주년 3·15기념식 및 직선제 개헌 쟁취 실천대회를 열었다. 학생들은 이날에도 마산∼충무간 국도를 차단하고 경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다 오후 5시35분 해산했다. 이날 시위로 7명의 학생이 연행됐으며, 그 중 2명은 구류처분을 받았다.

마산·창원과 진주 등 도시지역 외에는 유일하게 거창군 거창성당에서 2월 7일 '고 박종철군 추모미사'가 열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창은 특히 거창군농민회(회장 표만수)를 중심으로 거창성당(이윤호 신부·이은진 신부)과 갈릴리교회(유성일 목사) 등이 힘을 합쳐 다양한 투쟁을 전개한다. 3월 21일 거창지역 농가부채 조사 보고대회를 열었으나, 경찰과 군청, 읍·면·동 직원들이 대회장을 봉쇄하는 일도 있었고, 4월 6일에는 거창성당에서 농민 권익 향상을 위한 미사가 열리기도 했다.

또 4월 7일에는 황인성 농림수산부 장관이 거창을 방문, 도지사와 도내 시장·군수 등 400여명이 모인 가운데 거창읍 중동 한들에서 못자리 시연회를 가졌는데, 농민들이 구호를 외치며 행사장으로 뛰어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표만수 회장과 정신화·조종주·김언묵씨 등은 황인성 장관이 막 시연을 하는 순간 사회자의 마이크를 빼앗아 "농가부채 해결하라" "3월 21일 거창지역 농가부채 조사보고대회를 방해한 거창군수와 경찰서장은 공개사과하라"며 고함을 질렀다. 이들이 유인물을 뿌리기 시작하자 거창군수는 사색이 된 채 농민들을 쫓아다니며 유인물을 빼앗으려 했고, 경찰서장은 농민의 머리채를 잡아 끌며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이날 사건으로 농민 4명 전원이 구류처분을 받았다.(거창군농민회, <거창농민신문>, 1987년 7월 15일자>

당시 거창군농민회원들의 '골방' 회의 모습. 신문지를 발라놓은 벽과 찌개 등이 정겹다.
진주 대아고 학생들 학내문제로 봉기

◇대아고 학생들의 고교민주화 투쟁 = 당시의 또하나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은 진주대아고등학교의 고교생 민주화투쟁이다.

3월 10일 오전 8시30분 대아고(교장 심성재) 학생 10여명은 '보충수업비 환불대책위원회' '직선제 추진위원회' 명의로 된 '보충수업비 횡령에 우리는 분노한다', '직선제 쟁취하여 자주권 회복하자'라는 유인물 두 가지를 2·3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뿌렸다. 이어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은 교사들의 만류로 다시 교실에 들어가 자체 토론회를 갖고 교장과 면담했다. 면담에서 합의점이 나오지 않자 학생들은 4교시를 끝나는 종과 함께 3학년 모두 운동장으로 나와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요구 중에는 '우리는 입시 상거래를 위한 지식전달이 아닌 자주성, 창조성, 민주성을 기르는 인간교육을 원한다', '우리의 선생님들을 과다한 수업에서 해방시켜라'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학교는 박동주 등 주동자 2명을 제적시키고 10여명을 무기·유기정학 조치했다. 이들 학생들은 2~3일 후 진주경찰서 대공과에 잡혀가 조사를 받았는데, 주로 "배후조종자가 누구냐"는 추궁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미 86년 2학기를 끝으로 학교를 그만둔 불어교사 문진현씨가 배후로 지목됐다. 경찰은 문씨를 전국에 수배했다. 문씨는 현장노동자로 위장취업하기 위해 4월 19일 용접기사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4월초 자신의 사진이 붙어 있는 수배전단을 발견하고 부산으로 피신했다.

문씨는 "6월항쟁이 끝난 후 마산시외버스터미널 인근 다방에서 경남도경 공안분실 경찰관을 만나 진술서를 쓴 후에야 수배에서 해제될 수 있었다"며 "6월항쟁이 없었더라면 계속 쫓기는 몸이 됐든지, 감방에 갔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또 당시 제적당한 박동주씨는 "학교에서 징계를 받은 후 학교에 찾아가 복교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기도 했으나 부모님들께 끌려나오기도 했다"며 "6월항쟁 이후 제적에서 자퇴로 감경됐으나 결국 검정고시를 통해 고졸학력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기획취재는 문화관광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 지원을 받아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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