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경남 6월에서 9월까지 항쟁의 기록]⑫박종철의 죽음과 2·7국민추모회

   

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서울대생 박종철이 고문으로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실은 다음날인 15일자 <중앙일보> 사회면에 '경찰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평범한 제목의 2단 짜리 기사로 알려졌다. 그러나 기사의 파장은 컸다. 경찰은 자체 진상조사 결과 책상을 '탁' 치니 '억'하며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유치한 경찰의 거짓말은 국민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됐다. 이후 <동아일보>의 끈질긴 추적취재로 물고문 사실이 드러나고, 이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축소조작 사실까지 밝혀지면서 거대한 국민의 분노는 6월항쟁으로 이어진다.

87년 2월 7일 마산역 광장에 모인 시위대의 가두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전투경찰이 역 진입로를 가로막고 있다.
◇2·7 국민추도회로 항쟁 점화 = 경남에서도 박종철이 숨진 지 열흘이 지난 1월 25일 경상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총학생회와 동아리연합회 주최의 '박종철 추모 침묵시위'를 시작으로 곳곳에서 추모제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가 줄을 잇게 된다.

25일에는 경남대에서 '살인 고문 규탄대회 및 고 박종철 동지 추모제'가 열렸고, 2월 2일 오후 7시 마산 남성동 성당에서는 천주교 마산교구 사제단과 평신도사도직협의회, 정의평화위원회, 수녀연합회 공동주최로 '고문종식과 민주화를 위한 미사'가 열렸다.

전국적으로 조직적인 투쟁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고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가 정한 2월 7일 국민추도일 집회가 시작이었다. 경남에서도 '고문 종식과 민주화를 바라는 경남도민 및 제 민주화운동단체' 주최로 2·7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를 오후 2시 마산 가톨릭여성회관에서 열기로 했다. 마산 이외에도 거창성당 등 도내 8곳에서 2·7 추도회가 예정됐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유인물을 보면 마산 추도회 참가단체는 가톨릭노동장년회 마산교구연합회, 가톨릭사회교육회관, 가톨릭여성회관, 가톨릭 정의평화위원회, 경남민주노조쟁취위원회, 경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주산악회 경남지부, 민주헌정연구회 경남지부, 신한민주당 경남제1지구당(마산), (주)통일노동자생존권쟁취투쟁위원회, 한국가톨릭농민회 경남연합회, 한국기독교장로회 한교회, 한국기독청년경남협의회 등 13개 단체였다.

마산 가톨릭여성회관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2·7국민추도회를 알리는 전단.
유인물 뒷면에는 2월 7일의 국민 행동요령이 이렇게 적혀 있다.

-추도의 리본(검은색, 흰색)을 달고 오후 2시에는 추모 묵념을 합시다.

-오후 2시에 자동차는 경적을 울리고 교회와 사찰은 타종을 합시다.

-추도회에 참석하시는 분은 반드시 꽃한송이를 갖고 와 헌화합시다.

이어 '전두환 살인·고문정권의 응징을 위한 국민 실천 지침'도 적혀 있다.

1. 우리의 세금으로 사람이나 죽이는 정권에겐 세금을 내지 맙시다.

1. 다가오는 모든 선거에서 민정당 살인집단에게 한표도 주지 맙시다.

1. 고문살인 일삼는 폭력 경찰·검찰에 항의, 경고 전화를 겁시다.

그러나 경찰은 이날의 집회를 저지하기 위해 2월 6일 밤 11시40분 마산동부경찰서 소속 수사과·정보과 형사와 전경 등 50여명을 가톨릭여성회관에 기습 투입, 추도회 준비물과 시위용품을 모두 압수했다.

2월 7일 새벽 '고 박종철군 경남도민추도회 준비위원회' 명의로 발표된 규탄 유인물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해놓고 있다.

"경찰은 이경민 판사 명의로 된 압수 수색영장을 소지하고 와 회관의 문을 열 것을 요구했으나 회관 직원은 당연히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경찰은 창문을 비틀어 제끼고 난입하여 3층 건물 전체를 샅샅이 뒤져서 '고 박종철군 추도회 및 고문살인 규탄대회', '종철이를 살려내라', '타도! 학살정권' 등이 적힌 현수막과 '살인고문 자행하는 군사독재 타도하자', '용공조작 분쇄하여 장기집권 저지하자' 등이 적힌 피켓 20여개, 추도회를 알리는 홍보전단 수천매, 각종 유인물, 자료집 등을 압수해갔다. (…중략…) 우리는 이번 경찰의 심야 난입·압수수색을 '추도식 준비물 강탈사건'으로 규정하고 이를 규탄해 마지 않지만, 이번 압수수색영장 집행의 적법성 여부(집시법 적용하여 무차별 압수수색)에는 이미 관심이 없다. (…중략…) 한 꽃다운 젊은이를 고문살인하고도 국민을 기만하더니, 이번에는 범국민적인 추도식을 원천봉쇄 운운하며 방해하기에 혈안이 된 현정권의 작태가 가소로울 뿐이다."

◇지역언론의 눈물겨운 정권 옹호 = 가소로운 것은 경찰의 작태 뿐이 아니었다. 경남대도 6일 밤 "자체 대학구내 수색을 벌여 추도회 행사 안내전단 및 불온유인물 30여매를 압수"했다.(경남신문 87년 2월 7일자 11면) 대학의 교직원 뿐만 아니라 언론인들도 정권 유지를 위한 용병에 다름아니었다.

마산 양덕성당 앞의 전투경찰. 담 안쪽에 학생들의 얼굴이 보인다.
2월 5일자 <경남신문>에는 이광석 이사(시인)의 이름으로 '입춘대길 봄은 오고 있는데…2·7 명동집회를 보는 우리의 우려'라는 칼럼이 실렸다.

언론인이자 시인답게 당시의 정국을 "봄은 오고 있"다고 표현한 이광석은 "특히 이번 대회가 인천사태와 같은 혼란사태의 재연이 예상되는데다 시기적으로 개학과 더불어 시작될 운동권을 포함한 극렬재야세력의 이른바 '춘투'와 바로 연결될 가능성도 없지 않아 우리의 우려는 실로 큰 것이다"고 걱정하고 있다.

이광석은 이어 "잘 알다시피 이번 사건을 정략적으로 이용할 경우 당국의 분석처럼 '또다시 사회불안이 조성되고 국민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주게 될 것이며 불법적 선동집회를 잇달아 열고 악의적인 유언비어를 유포하게 되면 운동권 재야를 더욱 자극, 결국은 인천사태와 같은 위험한 소요사태를 초래할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저버릴 수 없다"고 경고한다.

독재정권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해온 '용공' 공세도 잊지 않는다. "또한 '좌경용공분자들에게 또다른 발호의 기회를 제공,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려는 좌경 용공세력들의 기도를 부추기는 결과로서 이는 궁극적으로 북괴를 이롭게 할 것'임도 냉철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의 글은 시인(?)답게 계절을 끌어와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우리 말에 '입춘, 거꾸로 붙였나?'는 얘기가 있다. 입춘 지난 뒤에 날씨가 몹시 추워졌을 때 쓰는 말이다. 이제 입춘도 지났다. 건양다경(建陽多慶), 따뜻한 봄기운이 추위를 녹이고 얼음장도 녹일 것이다. 자연의 순리처럼 우리의 정치문화에도 화락(和樂)의 새봄이 충만했으면 하는 생각 간절하다."

마산 양덕성당과 가톨릭여성회관 사이를 막고 있는 전투경찰과 차량. 왼쪽 상단에 가톨릭여성회관 옥상의 시위대 모습도 보인다.
글이란 정말 무서운 것이다. 수십년, 수백년이 지나도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 때문이다. 이 칼럼이 실린 날 <경남신문> 1면 머리기사의 제목은 '2·7 명동집회 엄중대처'였고 부제목은 '김 법무 담화 유인물 내용 체제전복 노려…안정 위한 정부조치 깊은 이해 당부'였다.

10면에는 관련 상자기사도 실렸는데, 제목은 '좌경·용공세력 발본색원'이었다.

이처럼 언론까지 동원한 정권의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2월 7일 당일 미리 가톨릭여성회관 안에 들어가 있던 20여명의 주최측 인사들은 오후 2시쯤 건물 3층 옥상 바깥으로 현수막을 내걸고 스피커를 설치했다. 경찰의 행사장 봉쇄로 가톨릭여성회관 안에 들어오지 못한 학생 200여명은 근처 양덕성당에 집결했고, 마산역 광장에도 1000여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오후 2시 회관 옥상에서 추도시 낭송과 고문살인 규탄성명서 낭독이 시작됐다. 양덕성당 마당에 모인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행사장 진입을 시작했으나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했다. 밀고 밀리는 사이 마산역 광장 일대에는 거의 2000여명의 시민들이 운집해 있었다. 역 광장에서는 스크럼을 짠 시위대열이 형성돼 경찰과 대치했다. 돌과 최루탄이 오가는 공방전은 오후 5시20분까지 계속됐다. 이날 시위로 모두 30여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하지만 이날의 시위경험은 박종철군의 49재이자 전두환 대통령 취임 6돌을 맞는 3월 3일의 전국적 시위로 확산된다.

87년 당시 '지하운동권' 조재석씨

   
 
  조재석 씨.  
 
창원대 84학번인 조재석씨는 85년 봄부터 골방에 모여 '학습'을 하고 시위를 기획했던 운동권 학생이었다. 그러나 창원대 학생들 중 그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단 한번도 공개조직에서 직책을 맡아 본 적이 없이 철저히 '언더 조직'에만 속해 있었기 때문. 6월항쟁 이후에 발간된 창원대 교지 <봉림문화> 87년호에는 '87 창대 학생활동과 6월투쟁'이라는 기획 글이 실려 있는데, 현재 청와대 행정관으로 있는 진광현씨가 필자로 돼 있다. 그러나 실제 필자는 조재석씨였다. 당시만 해도 조씨는 '언더'에 있었기 때문에 공개된 인물인 진씨의 이름을 빌렸다는 것이다.

그는 '민속문화연구회 한마당'이라는 동아리에 가입했는데, 85년 4·19행사를 준비하면서 학생운동에 눈을 떴다고 한다.

"당시 언더그룹에서는 '기록을 남기지 말 것'과 '사진 찍지 말 것'이 철칙이었어요. 경찰에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죠."

당시의 집회는 형식적으로 총학생회가 주최하는 모습이었지만, 실제 집회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것은 언더그룹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시위의 경험이 많지 않았던 터라 시행착오도 속출했다.

"5·10 신민당 개헌 현판식 때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일인데, 이날 싸움을 위해 화염병을 만들었죠. 그런데 화염병을 사용해본 경험이 없었던 터라 소주병을 이용하지 않고 박카스 병으로 만들었어요. 작아서 운반하기도 좋고, 경찰의 검문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마침내 경찰과 대치한 지점(산호공원 입구)에서 박카스 화염병을 던졌는데, 하나도 깨지지 않고 방패에 부딪치면서 '틱'하는 소리만 내고 바닥에 떨어져 버렸어요. 화염병 역할을 전혀 못한 거죠."

87년 첫 대규모 시위였던 '2·7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때도 그는 현장에 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투쟁은 서툴기 짝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양덕성당에서 스크럼을 짜고 가톨릭여성회관으로 가기 위해 6열종대로 행진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우리를 저지하는 경찰은 단 한줄로 2차로를 가로막았죠. 6열의 시위대가 한줄 저지선을 뚫지 못했던거죠. 대열의 후미에서 계속 미는 바람에 스크럼이 찌그러지면서 넘어져 신발을 잃어버린 사람이 많았어요."

20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사회에 대해 그는 "당시 6월항쟁의 주역이었던 노무현씨가 대통령이 되어 있지만, 아직도 민주화운동세력은 한국사회의 변방"이라며 "다시한번 민주세력이 뭉쳐 다수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기획취재는 문화관광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 지원을 받아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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