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경남 6월에서 9월까지 항쟁의 기록]⑪항쟁의 시작, 86년 투쟁3월 민통련 개헌서명에 도내 신부들 대거 참여
5월 경남 4개대학 개헌 현판식장 앞 연합 집회

   
86년은 재야와 학생운동권의 민주헌법 쟁취 투쟁과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이 본격화한 해였다. 따라서 87년 6월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은 이미 86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게 옳다.

◇막 올린 민주헌법 쟁취투쟁

3월 5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의장 문익환)은 서울 중구 쌍림동 쌍림다방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군사독재 퇴진 촉구와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범국민 서명운동'을 전개해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이 자리에서 이미 서명한 각계 민주인사 303명의 명단을 공개했는데, 이들 중 부산·경남의 서명자들은 다음과 같다.

김광일(변호사), 김석좌(신부), 김영식(신부), 노무현(변호사), 도현(스님), 문재인(변호사), 박두환(신부), 배진구(신부), 서정술(신부), 송기인(신부·부산민주시민협 의장), 신은근(신부), 심응섭(목사), 오수영(신부), 원오(스님), 유영봉(스님), 윤정규(작가), 이두호(신부), 이응석(신부·민통련 경남지부 의장), 이종창(신부), 정순구(신부), 조재영(스님), 진우(스님), 최용진(신부), 허봉(부산민주시민협), 허성학(신부), 혜조(스님).

이 명단은 86년 3월 25일 발간된 월간 <말> 제5호에 실려 있는데, 이들 중 '스님'으로 표시돼 있는 유영봉·조재영은 마산교구 소속의 '신부'를 오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 김석좌·김영식·박두환·배진구·서정술·신은근·이응석·이종창·정순구·최용진·허성학 신부도 마산교구 소속이었다.

3월 17일에는 창원공단의 (주)통일 노동자들이 점심시간을 이용, 투쟁을 시작했다. 허재우가 식판을 엎었고, 박성철·여영국은 유인물을 뿌렸다. 정광희가 식탁 위로 올라가 선동연설을 시작했다.

관리자들이 밀어 닥치자 이들은 식판을 던지며 필사적으로 몸싸움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7명이 연행돼 2명이 구속됐다. 이날은 서울 구로공단에서 노동자 박영진씨(당시 26세)가 신흥정밀 기숙사 옥상에서 부당해고 철회를 요구하는 농성을 벌이다 분신자결한 날이기도 했다.

민통련 경남지부(의장 이응석)는 이와 관련 '노동운동 탄압하는 군사독재 몰아내자!'는 성명서를 내고 지원투쟁에 나선다.

◇도내 4개 대학 연합 시위

86년 5월 10일 신민당 개헌 현판식에 앞서 경남대·경상대·창원대·울산대 학생들이 마산 공설운동장에서 자체 집회를 열고 있다. 펼침막에 경남대·창원대·경상대 글씨가 보인다.
4월이 되자 대학가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교내 집회가 연일 이어졌고, 21일과 29일에는 경남대 교수 30명과 경상대 교수 20명이 시국선언을 통해 개헌과 언론자유를 촉구한다.

5월 10일은 야당인 신민당의 헌법개정추진위원회 경남지부(지부장 최형우) 현판식이 예정돼 있었다. 4월 27일 경남대총학생회장 김성진과 김우용, 박성원, 허태유, 전창현 등 학생들은 2주일 후 마산에서 열릴 개헌 현판식을 앞두고 진주 촉석루에 모여 시위를 '예비음모'한다.

개헌 현판식을 이용, 경남대와 경상대·창원대·울산대 등 4개 대학 연합시위를 열기로 한 것이다. 경남대 총학이 시위준비를 책임지기로 하고 5월 3일부터 7일까지 총학생회장실과 9호관 휴게실에서 화염병 200개와 '민중해방', '민족통일', '민주쟁취'라고 쓴 머리띠 1000여개, 펼침막과 현수막 각 3개, 홍보벽보 50여매, '군사독재 타도하고 민주헌법 쟁취하자', '붉은 피 속구치는 5월을 다시 맞이하여' 등 제하의 유인물 6종 6000여매를 제작했다. 이들은 7일 밤 진주 만우장여관에서 다시 각 대학 책임자와 '접선', 준비상황을 최종점검하고, 마침내 10일 낮 12시 개헌 현판식(오후 2시)이 예정돼 있던 마산종합운동장 실내체육관 앞에서 집회를 시작했다.

당시 허태유와 전창현의 집시법 위반 판결문에 따르면 이들은 오후 2시 40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자 스크럼을 짜고 연좌농성을 시작했다.

이날 신민당 개헌추진위 경남지부 결성대회 직후 쏟아져 나온 인파.
오후 5시 신민당의 대회가 끝나자 1000여명의 시민·학생의 선두에 서서 현수막을 앞세우고 산호동 신민당 경남 제1지구당 사무실 앞까지 행진하고 5시 45분께 현판식이 끝나자 다시 40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가야백화점 앞까지 행진을 하는 과정에서 경찰과 충돌했다.

이에 학생들은 화염병과 돌멩이, 벽돌조각 등을 던지는 등 6시25분까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로 42명이 연행됐고, 경남대 한명철(행정 3), 권호준(2부 법3), 강창훈(법2), 이성룡(회계 2) 등 4명이 구속됐으며, 김성진 김우용 등 수명이 수배됐다.

이날 집회는 경남에서 열린 최초의 4개 대학 연합집회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 때부터 5월과 6월 경남대·경상대·창원대 등 대학가에는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시위대와 경찰의 투석에 대비, 합판과 그물을 설치하고 있는 마산 산호동 썬스타호텔 직원들.
특이한 것은 5·10 시위를 주도한 경남대 학생들이 반미투쟁을 위해 마산 오동동의 '아메리카 가정보험'을 점거하려 했다는 것이다.

마산경찰서는 6월 13일 김성진(경제4), 김우용(심리4), 박성원(심리4), 염성용(정외2), 허윤영(정외4), 정용수(사회2) 등 6명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예비음모 혐의로 구속했다.

◇공개 투쟁조직의 출범

2학기에는 각 대학에서 공개적인 운동권 조직이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경남대의 경우 86년 2학기부터 임기가 시작되는 총학생회장에 비운동권 후보가 당선되자 가장 먼저 투쟁조직을 띄웠다.

9월 11일 총학생회 발대식에서 예정에 없던 교문 화염병 시위를 주도한 경남대 운동권 학생들은 다음날인 12일 10·18광장에서 '반제 반파쇼 민족해방 민중민주 투쟁위원회(민해투)' 발대식과 '86 아시안게임 제1차 저지대회'를 열었다.

이 투쟁을 주도한 김진갑(사학4)·서종(국문4)·박철민(심리3) 등의 집시법 위반 판결문을 보면 이날 발대식을 마친 학생들은 후문으로 진출, 제일여고 앞까지 가두투쟁을 벌인 것으로 돼있다.

이 때부터 이듬해 6월항쟁에 이르기까지 경남대의 투쟁은 '민해투'가 총학을 대신하여 주도하게 된다.

창원대도 10월 7일 공개적인 투쟁조직인 '민족자주화 민중민주화 투쟁위원회(자민투)'가 출범하고, 경상대에서도 10월 16일 '민족자주화 민중민주화 투쟁위원회(자민투)'가 연이어 발족하게 된다.

창원대 자민투 발대식에는 80여명이 참석했는데, 이 중 30~40여명이 경남대에서 원정온 학생들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창원대 교수들이 집회를 저지하면서 "다른 학교 학생들이 왜 왔느냐"며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고 한다.

10월 24일 경상대선 개척대동제 종야제를 마친 후 총학생회(회장 김현규) 주최로 최대규모의 인원인 2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교문투'가 벌어지고, 10월 25일에는 경남대와 창원대생들이 공동으로 마산 시내에서 기습시위를 벌인다.

이날 오후 7시 마산 창동 학원사 앞길에 창원대 박유호, 경남대 김진갑 등이 6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친미 군사독재 타도하여 민중정부 수립하자" "부마항쟁 계승하여 친미 군사독재 타도하자", "헌법특위 분쇄하고 민중의 힘으로 직선제 쟁취하자" "장기집권 획책하는 용공좌경 조작음모 분쇄하자" 등 구호를 외치며 '남성동파출소 진격투쟁'을 벌인 것.

이들은 화염병을 던지며 150여m까지 진격했으나 곧이어 몰려든 경찰에 저지당했다.

또한 1명이 구속되고 1명이 29일간 구류를 살았다고 한다. 당시 이 시위에 참여했던 조재석씨는 "이날 남성동파출소를 향해 던졌던 화염병이 하나도 파출소에는 맞지 않고 오히려 투쟁에 참가했던 학생들이 화상을 입는 일이 벌어졌다"고 회상했다.

또 이 사건 판결문에는 시위 주동 학생들이 시위에 앞서 "마산 동중학교에서 선창할 구호를 연습"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만큼 이 때까지만 해도 시위에 익숙하지 않았던 학생들이 열정으로 집회를 조직하고 시위를 준비했음을 엿볼 수 있다.

◇겨울방학에도 계속된 투쟁

11월에도 학생들의 시위는 계속됐다. 창원대는 교무과와 행정과를 점거, '살인마 전두환은 물러가라'며 농성을 벌였고, 이 사건으로 2명이 제적되고 4명이 무기징역을 당했다. 경남대도 김진갑·박재혁 등 100여명이 도서관을 점거, 18시간동안 농성을 벌였다.

이들 대학가의 투쟁은 겨울방학과 함께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든다. 하지만 곧이어 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대학가에 유례가 드문 방학중 투쟁이 불붙게 된다.

1월 25일 경상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총학생회와 동아리연합회가 '박종철 추모 침묵시위'를 벌인 것을 시작으로, 26일에는 경남대 총학생회와 민해투 공동주관으로 '살인고문 규탄대회 및 고 박종철동지 추모제'가 1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참석자들은 추도사와 추모시 낭독에 이어 <꽃상여를 타고>라는 추모가를 눈물을 흘리며 불렀다. 마침내 한국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된 87년 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창원대 '지하 운동권' 조재석씨

   
 
 
창원대 84학번인 조재석씨는 85년 봄부터 골방에 모여 '학습'을 하고 시위를 기획했던 운동권 학생이었다. 그러나 창원대 학생들 중 그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단 한번도 공개조직에서 직책을 맡아 본 적이 없이 철저히 '언더 조직'에만 속해 있었기 때문. 6월항쟁 이후에 발간된 창원대 교지 <봉림문화> 87년호에는 '87 창대 학생활동과 6월투쟁'이라는 기획 글이 실려 있는데, 현재 청와대 행정관으로 있는 진광현씨가 필자로 돼 있다.

그러나 실제 필자는 조재석씨였다. 당시만 해도 조씨는 '언더'에 있었기 때문에 공개된 인물인 진씨의 이름을 빌렸다는 것이다.

그는 '민속문화연구회 한마당'라는 동아리에 가입했는데, 85년 4·19행사를 준비하면서 학생운동에 눈을 떴다고 한다.

"당시 언더그룹에서는 '기록을 남기지 말 것'과 '사진 찍지 말 것'이 철칙이었어요. 경찰에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죠."

당시의 집회는 형식적으로 총학생회가 주최하는 모습이었지만, 실제 집회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것은 언더그룹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시위의 경험이 많지 않았던 터라 시행착오도 속출했다.

"5·10 신민당 개헌 현판식 때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일인데, 이날 싸움을 위해 화염병을 만들었죠. 그런데 화염병을 사용해본 경험이 없었던 터라 소주병을 이용하지 않고 박카스 병으로 만들었어요. 작아서 운반하기도 좋고, 경찰의 검문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마침내 경찰과 대치한 지점(산호공원 입구)에서 박카스 화염병을 던졌는데, 하나도 깨지지 않고 방패에 부딪치면서 '틱'하는 소리만 내고 바닥에 떨어져 버렸어요. 화염병 역할을 전혀 못한 거죠."

20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사회에 대해 그는 "당시 6월항쟁의 주역이었던 노무현씨가 대통령이 되어 있지만, 아직도 민주화운동세력은 한국사회의 변방"이라며 "다시한번 민주세력이 뭉쳐 다수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기획취재는 문화관광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 지원을 받아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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