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경남 6월에서 9월까지 항쟁의 기록]⑩87년 이전의 문화운동

문화운동은 권력에 마취된 시민의식에 '각성제' 역할을 한다. 최근 개봉돼 흥행중인 영화 <화려한 휴가>도 그럴 것이다. 80년대 신군부 세력의 서슬퍼런 억압 속에서도 스스로 각성제가 되기를 염원하며 희생을 무릅쓰고 문학과 공연 등을 통해 문화운동에 나선 이들이 있었다. 또한 그들의 반대편에는 문학을 독재권력에 대한 아부의 수단으로 전락시킨 이들도 있었다.
   
 
 

◇문학운동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하략)"

김춘수·이은상, 전두환 독재 옹호 앞장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다. 3·15마산의거 직후 희생된 학생들을 위한 추모시 <베고니아 꽃잎처럼이나>를 발표하기도 했던 그였지만, 전두환 독재의 총칼 앞에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통영 출신으로 통영중학교 교사를 지냈고, 마산의 민족자산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허당 명도석 선생의 사위이기도 한 그는 광주학살을 자행하고 권력을 잡은 전두환 일당과 함께 민정당 창당발기인 15명 중 한명으로 참여했다. 그 덕에 11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낸다.

마산이 낳은 <가고파>의 시인 이은상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독재권력에 대한 아부와 충성은 한수 위였다. 이승만·박정희에 대한 충성에 이어 전두환이 집권하자 <정경문화> 1980년 9월호에 '새 대통령에게 바란다'라는 글을 실어 "전두환 대통령의 당선을 경하하며", "한국의 특수한 상황으로 보아 무엇보다도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는 것이 거의 일반적 여론"이라는 글을 쓰고 다음해 4월 전두환 정권의 국정 자문이 된다.

이들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꼽히는 김동리도 87년 전두환의 '4·13호헌조치'를 지지하는 성명을 문협 이사장의 자격으로 발표했으며, <국화 옆에서>의 시인 서정주는 <전두환 대통령 각하 제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라는 낯뜨거운 시를 87년 1월에 발표한다.

이들 친독재 문인들은 90년 3당 합당을 열흘 앞둔 1월 13일 <조선일보> 광고면에 '90년대를 맞는 문학인의 결의'라는 성명서를 발표한다. "예술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짓밟고 문학을 좌익이념의 시녀로 전락시키며 자유민주주의의 토대를 무너뜨리고 오히려 폭력혁명세력의 선전도구 구실을 하는 목적주의 문학집단을 배격한다"는 내용이었다.

문학이 이념의 시녀가 되어선 안된다고 주장한 이들 문인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아니러니하게도 독재정권에 아부하는 작품과 글을 경쟁적으로 써온 김동리·김춘수가 주동이었다. 경남과 연고가 있는 문인들 중에는 정목일·박재두·이광석·이월수·설창수(작고)·추창영·김춘수·이중 등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이 '문학을 좌익이념의 시녀로 전락시키며 (…) 폭력혁명세력의 선전도구 구실을 하는 목적주의 문학집단'이라고 지목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아마도 '민중문학·민족문학'을 지향했던 문인들이었을 듯 하다.

청년·노동자 동인 '민중문학'으로 시민각성 유도

경남에서는 80년대 초반부터 활동해온 청년문학동인들이 있었다. 박명윤(마산MBC 박진해 사장의 80년대 필명)씨가 87년 창원대 교지 <봉림문화>에 쓴 '마산·창원지역 문학의 현단계'에 따르면 당시 경남대의 '갯물', 수출자유지역 노동자들로 구성된 '갯벌', 창원공단 노동자로 짜인 '남천', 통신문학 형태의 '살어리', 그리고 '한마시대', '3·15', '마산의 시학' 등 동아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동인들은 청년문학도라는 특성에도 불구하고 기성문인들의 행태를 단순 재생산하는 데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박영주, 마산의 새로운 문학운동을 생각한다, <마산문화> 3권, 1984)

이런 가운데 82년 말 첫호를 낸 부정기간행물 <마산문화>는 기성문인 가운데 역사의식에 입각한 독자적 목소리를 지니고 있던 고 정진업·이선관 시인의 문학세계를 소개했고, 민족현실과 지역현장에 뿌리내린 문학을 지향하는 박영주·이재업·조성래·정완희·유동렬·김종우 등 젊은 문학인들의 시와 평론을 선보였다.

특히 <마산문화> 1집에 실린 소설 <수출자유지역의 하루>는 최초의 노동소설이라고 할만 했다. 수출자유지역 내 삼미주식회사에 근무하고 있던 여성노동자 최순임이 쓴 이 소설은 박노해가 나오기 이전의 노동문학의 가능성과 더불어 많은 이들에게 감동적인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80년대 초·중반의 이런 활동은 87년 이후 본격적인 민중문학·노동문학을 내세운 '참글'과 '밑불'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마당극 운동 = 80년대 운동의 현장에는 언제나 놀이문화가 있었다. 81년 가톨릭농민회 경남연합회가 진영성당에서 개최한 '81 추수감사제 및 경남농민대회' 행사 세부계획 문건을 보면 농악대의 공연과 탈춤, 그리고 무당의 농민위령제 행사가 포함돼 있다. 당시 무당 역할은 경북대 이윤석이 맡았다. 농악대와 탈춤 공연은 82·83년 추수감사제에도 빠짐없이 등장한다.

84년 추수감사제는 11월 14일 진양군 문산성당에서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는데, 특이하게도 3부 '잔치와 다짐'에서 경상대 학생들로 구성된 '분도 소극장'의 마당극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에 앞서 8월 18·19일에는 역시 문산성당에서 농민들의 수세현물납세투쟁을 극화한 마당극 <농풀이>가 마산 한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청년·학생들에 의해 공연되기도 했다. 거창에서는 한대수씨가 그해 '우리문화연구회'를 만들었는데, 이때부터 농민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풍물강습이 시작되기도 한다.

농민운동과 결합된 공연문화와 별도로 81년 마산에서는 극회 '불씨촌'의 창작 마당극 <이렇게 이렇게 우리 한 판>이 1월30·31일, 2월 1일 사흘간 소극장 맷돌사랑에서 공연된다. 남아 있는 당시 공연팸플릿을 보면 이윤도씨가 연출을 하고, 문둥이역에 이재업, 거지역에 박영주, 창녀역에 김시옥, 목사역에 천정식, 전도사역에 홍윤영, 사장역에 강경윤 등이 연희자로 나왔다.

82년 11월 27일에는 마산YMCA 대학연합부 탈춤연구반이 완월국민학교 넓은마당에서 창작마당극 <새물굿>을 공연한다. 83년 2월 5·6일에는 역시 소극장 맷돌사랑에서 맷돌마당패의 마당극 <암태도> 공연이 이뤄졌다. <암태도>는 소작쟁의를 소재로 한 송기숙의 소설인데, 당시 독재정권의 입장에서 볼 땐 다분히 '불온적'인 내용이었다.

84년에는 진주에서도 마당극 운동이 일어난다. 그해 3월 진주 칠암동 경상대 칠암캠퍼스와 진주농전 정문 사이 건물 지하에 소극장 '분도'가 문을 열고, '물놀이'라는 마당극패가 탄생한다. 이들은 11월 14일 문산성당 공연에 이어 그해 11월 30일부터 사흘간 진주민란을 소재로 한 <진양살풀이>를 공연한다. 대본은 시인 정동주가 썼고, 연출은 이성우, 소리는 선동욱이었다.

출연한 놀이꾼은 강병기, 문갑현, 황미란, 민경애, 최증현, 한명자, 박재한 등이었는데, 경상대 학생들이 중심이었다. <진양살풀이>는 85년 마산공연까지 갖게 되는데, 극동예식장 별관에서 2000원의 입장료까지 받은 것으로 돼 있다.

85년에는 이런 문화운동의 성과를 바탕으로 '경남민속문화연구회'가 7월 7일 마산 오동동 박소아과 의원 4층에서 창립된다. 회장에는 전정효 마산MBC PD가 선출됐으며, 부회장은 김종석 마산간전 강사와 전선희 마산 제일여중 교사, 지역대표는 조성국 영산줄다리기 기능보유자, 이승철 거제군청 공무원, 박종섭 거창상고 교사등이 맡았다.

또 운영위원장은 이곤섭 마산 창신고 교사, 연구위원장은 박종섭, 전승위원장은 박철 한의사, 홍보위원장은 박진해 마산MBC PD 등이 맡았다. 회원은 52명이었으며, 이들은 마산 농청놀이를 참관하고 풍물강습을 받았으며, 10월에는 경남학생과학관 대강당에서 서울 세실극장 '뜬쇠'를 초청, 사물놀이 공연을 주최하기도 했다.

이런 문화운동 또한 87년 6월항쟁을 이끈 '각성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마산·진주 마당극 활발…대안언론도 속속 창간

◇대안언론 운동 = 이 시리즈 첫회(5월 11일자 6면 보도)에서도 간략하게 살펴봤듯이 당시 제도언론이었던 <경남신문>이나 MBC 등은 독재에 저항하는 시민의 목소리를 제대로 전달하기는커녕 독재권력을 합리화하는데 급급해 있었다.

이에 따라 당시 농민과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전달할 매체가 필요했다. 앞에서도 여러번 언급한 <마산문화>도 그런 대안 중 하나였다. 임수태·손성기씨 등이 주도한 의창군농민협회가 86년 9월 5일 타블로이드 신문형태로 창간한 <농민의 벗>이 그랬다.

이 신문은 89년 전국농민회 총연맹이 창립될 때까지 3년간 매월 3000~5000부가 배포될 정도로 농민들에게 사랑받은 매체였다. 87년 11월 15호는 9000부가 발간됐는데, 경찰에 의해 강제탈취당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85년부터 발행되기 시작한 <통일노동자신문>(처음엔 (주)통일노조소식으로 창간)도 그랬고, 각종 단체에서 수시로 발행·배포한 유인물 또한 훌륭한 대안언론매체였다.

87년 6월항쟁 기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에서 발간한 <국민운동>이 대안언론의 역할을 수행했고,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는 <마창노련신문>이 지역에서 노동자의 매체를 자임했다.

6월항쟁의 결과로 얻어진 언론자유의 배경에는 이와 같은 이른바 '운동권'들의 언론민주화 투쟁이 있었다. 그러나 잠시 반짝했던 제도언론의 노동조합 설립과 편집권 독립투쟁은 얼마 가지 않아 한계를 드러냈고, 이런 한계는 결국 88년 <한겨레신문>의 창간과 99년 <경남도민일보>의 창간 배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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