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무척 돌과 가깝다. 돌을 문화적 도구로 사용한 이래 벼루만큼 우리의 사랑을 받은 것도 드물다. 문방사우라는 말이 가리키듯 종이와 붓, 벼루 그리고 먹은 선비의 안방을 차지했고 선물의 으뜸자리를 유지해왔다. 임금의 하사품에 비록 붓이 빠지더라도 벼루는 예외가 아니었으니 그 사랑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서구문명과 기계화로 벼루는 더 이상 존재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외국인의 관광상품이나 고급선물 정도로 본래의 기능을 상실해버린 것이다. 정확하게 누가 돌을 벼루로 만들었는지 밝혀진 바는 없다고 한다. 초기엔 기와나 도자기를 이용해 벼루로 썼고, 그러다가 점차 단단하고 덜 깨지는 돌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에서 돌을 벼루로 널리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때부터다. 실용성으로 출발해 점차 장식을 새기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하나의 예술품으로 승화되었다. 벼루엔 명칭도 참 많다. 구름같이 새겨져있으면 운월연(雲月硯), 기와모양이면 와양연(瓦樣硯), 대나무 마디 같으면 죽절연(竹節硯)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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