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경남 6월에서 9월까지 항쟁의 기록]⑦87년 이전의 노동운동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80년대 초·중반 경남지역 노동운동의 핵심인물이었던 문성현·이석행씨. 그리고 노동운동가 양성에 힘썼던 정동화, 고 이경숙, 고 황주석, 정혜란, 이상익씨와 학습모임을 주도한 주대환씨.
앞에서 살펴봤듯이 80년대 학생운동의 원천이 된 것은 '학습'의 힘이었다. 같은 시기 노동운동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그 또한 '학습'이었다.

워낙 열악한, 아니 처참한 노동현실이 그렇게 만든 배경도 있었지만, 그 또한 운동으로 이어지기 위해선 '학습'을 필요로 했다.

당시 마산수출자유지역은 71년 입주업체 가동 이후 80년까지 단 1개의 노동조합도 인정되지 않는 노동법의 치외법권 지대였다. 76년 한국스와니라는 업체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됐으나 일본인 업체들이 노동청을 협박, 노조 설립신고 필증을 내주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실패한 적도 있었다. 수출자유지역 노동자들의 처지에 대해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가 80년 3월 27일 발간한 실태보고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85년 통일노조 수호투쟁위 유인물
◇일본인들에게 점령된 마산 = "지금 마산은 일본인들에게 점령되어 있다. 이들은 MAFEZ(마산수출자유지역)를 발진기지로 하여 낮에는 1천원권 지폐 한 두장으로 우리의 순박한 아들 딸들을 혹사하고 있고, 밤에는 5천원권 한 두장으로 유흥업소에서, 숙박업소에서 우리의 체념어린 딸들을 희롱하고 있다. 손끝이 닳고 뼈마디가 죄어드는 그 고통스런 노동을 우리의 순박한 아들·딸들은 묵묵히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들은 회전의자에 앉아 채찍질하고 있고 "개같은 세상, 개같이 살다, 개같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체념어린 우리 딸들의 절규를 이들은 보료 위에서 완상(玩賞)하고 있다. (…) 폐유와 폐수로 더럽혀진 마산항에 이들 가련한 우리 딸들의 눈물이 뿌려져서는 안된다. (…) 가난해서 못배운 죄로 사회에서 격리되어야 했으며, 밀린 임금조차 받지 못해 셋방을 쫓겨나고 끼니를 잇지 못하면서도 하늘을 향해 주먹을 흔들 뿐이었다. (…) 맨손으로 고향에 있는 아버지 어머니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없었던 나어린 실직여공들은 환락가의 노리개나 윤락가의 '악의 꽃'이 되어야 했다. 그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당시 마산교구 가톨릭노동청년회 배진구 지도신부 등이 함께 참여했던 이 보고서가 나올 무렵, 수출자유지역의 북릉이라는 업체에서 처음으로 신고필증을 받은 노조가 설립되었으나 이 마저 상부의 압력으로 취소됐다고 한다.

그 이후 수출자유지역에서 '단체행동' 움직임이 나온 것은 85년 11월 한국수미다였다. 2500여명의 여성노동자 중 절반 정도가 점심시간을 이용, 회사옥상에 모여 사측을 성토하려 했으나 남성 중간관리자들이 심한 욕설을 퍼부으며 강제해산시키고, 주동자 3명을 해고했다.(<경대문화> 19집, 1986) 이 때의 실패는 2년 후인 87년 8월 노조 결성으로 이어졌으나 일본인 자본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끝내 89년 10월 자본철수로 대응한다.

▲ 85년 9월 통일노조 소식지.

◇지식인과 노동자들의 만남 = 이처럼 수출자유지역이 노동운동의 치외법권 지대로 있는 동안 바깥에서는 노동자들의 억눌린 불만과 욕구, 지식인들의 목적의식적인 변혁의지가 결합돼 활발한 '학습'이 이뤄지고 있었다. 81년 요가운동가이자 양심적 기독교인이었던 신석규 장로와 마산YMCA 간사로 온 황주석씨(작고) 등이 개척한 한교회가 그 중심이었다. 주대환과 서익진, 박진해, 박영주, 이재업 등 <마산문화> 편집진과 이상익을 주축으로 한 정혜란, 고승하, 허진수, 김정석 등 YMCA 세력, 그리고 문경범을 주축으로 한 노동세력 등이 한교회를 중심으로 포진해 있었다.(유경호, 뜻하지 않은 과거로의 여행, <나와 한교회>, 2001)

이 무렵 주대환과 신덕우(당시 부산수산대학생), 서울서 온 김동민, 이태수 등은 마산 완월동 일대에서 '산동네그룹'이라는 학습모임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이후 노동운동 지도자가 되는 박희근(삼미금속), 김명길(세신실업), 이학용(삼미특수강) 등이 함께 했었다고 한다. '산동네그룹'이란 이름은 신덕우의 집이 현재 완월동 화인아파트 자리쯤에 있어 그렇게 불렸는데, 이후 신덕우도 대원강업을 거쳐 마창노련 간부를 지내는 등 노동운동가가 됐다.(주대환·박영주의 증언)

한교회와 별도로 마산YMCA의 황주석·정혜란 간사, 박성철((주)통일), 문경범(현대정공), 황호남(현대정공) 등을 중심으로 한 '사랑의Y노동형제단'도 빼놓을 수 없다. 박성철의 기억에 따르면 83년 무렵 마산 한일합섬과 수출자유지역, 창원공단의 통일, 기아, 현대정공, 동명중공업 등에서 모두 40~50여명이 현장소모임을 통해 '학습'을 진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교회 · Y노동형제단 거점 선진 노동운동가 대거 배출

또한 70년대부터 가톨릭마산교구와 가톨릭여성회관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가톨릭노동청년회(JOC)도 노동자들의 '학습'을 이끌었다. 여기에는 지도신부였던 배진구·허성학 신부와 71년부터 초대회장을 맡아 노동장년회를 거쳐 84년 가톨릭노동상담소를 만든 정동화, 81년부터 가톨릭여성회관에서 간사를 했던 이경숙(작고·전 도의원) 등의 역할이 컸다. JOC 출신 노동운동가로는 한국중천의 이종엽(현 창원시의원), 이호성((주)통일) 등이 있다.

▲ 87년 문성현씨의 검찰 공소장.
◇현장에서 단련된 '학출'과 '노출' = 이들 종교단체를 거점으로 '학습'을 통해 단련된 이들과는 달리 아예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현장에 잠입(?), 노동운동 지도자로 성장한 이들도 있다. 이런 노동운동가를 '학출'이라고 불렀는데, 현 민주노동당 문성현 대표가 그랬다. 또한 공고를 나와 노동현장에서 스스로 모순을 깨닫고 운동가로 성장한 이로서는 현 민주노총 이석행 위원장을 들 수 있다. 이런 사람을 '노출'이라고 불렀다.

87년 거제 대우조선 노동쟁의를 배후조종한 혐의(국가보안법·노동조합법·노동쟁의조정법 위반)로 구속기소된 문성현의 당시 공소장(검사 이춘성)에는 이렇게 문성현을 설명하고 있다.

"피고인은 1971. 3경 서울상대 경영학과에 입학하여 2학년 때인 1972. 서울 평화시장 피복근로자로서 분신자살했던 전태일이 쓴 일기장 중 "나에게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이라는 귀절을 읽고 대학 졸업 후 노동현장에 뛰어들어 이른바 현장실습을 통하여 근로자들을 의식화시키는 등 노동운동을 할 것을 마음먹고, 1975. 2 경 서울상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77. 12 경 육군 포병 병장으로 만기 제대한 후 1979. 12 경 서울 용산구 원효로 소재 한도공업사에 학력을 고등학교 졸업자로 낮추어 선반공으로 취업…."

검사의 소개대로 문성현은 이후 동양기계에 선반공으로 입사, 공장 안에서 '차돌회'라는 모임을 하면서 동지들을 규합, 노동운동을 본격화했다. 83년 동양기계가 창원으로 이전하면서 회사 이름도 통일산업으로 바뀌고, 이곳에서 노조사무장을 거쳐 85년 노조위원장을 맡으면서 마창지역 노동운동의 대표적 인물이 된다.

이 과정에서 문성현은 위장취업 사실이 탄로나 동료노동자들로부터 위기에 처했으나 동료노동자들은 "대학졸업자는 사장만을 위해 일하란 법이 어디 있느냐"며 오히려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 MAFEZ 휴폐업 실태보고서.
◇문성현과 이석행 운명의 만남 = 이석행은 전남 기계공고 출신으로 진주 대동공업사(이후 대동중공업)에 병역특례로 입사한 노동자였다. 79년부터 노조 대의원이 된 그는 80년대 초반 공장 내에서 비밀 소모임을 운영하다 84년 노조위원장으로 당선된다. 그는 당선되자마자 방위산업체로선 처음으로 파업을 단행한다.

"85년초 서울 구로공단에서 소모임을 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저는 노조위원장으로서 파업을 주도하기도 하고 승리도 쟁취했었기에 나름대로 우쭐함을 가지고 있었지요. 토론 중 한 동지가 저에게 파업투쟁을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더군요. 저는 그 당시 생각하고 있던 그대로 "회사가 노동자의 요구를 안들어주니까 보복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한 여성동지가 "노동운동은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투쟁이다. 이것에 대하여 진정 고민해본 적이 있는가? 이 동지가 계속 그런 시각을 가지고 운동을 할 것이라면 당장 때려치우라"는 비판을 가해왔습니다."(<노동해방문학> 통권 3호, 1988)

이 때 이석행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후 '학습'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며 고민하던 차에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바로 문성현이었다.

"울산에서 노동자 모임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문(성현) 동지 말에 공감을 하면서 이후 매우 친하게 지냈습니다. 노동서적도 소개받고, 고민이 있을 때면 상의도 하고 비판도 받으면서 노동자적 관점을 키우는 데 크나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들 두 사람은 각각 마창지역과 진주지역 노동운동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고, 통일과 대동중공업은 각각 마창과 진주의 중심사업장이 된다. 이들과 함께 현장에서 성장한 노동자들과 앞서 한교회·YMCA·JOC 등 종교단체를 거점으로 성장한 노동자들은 87년 6월항쟁에서도 '노동자투쟁위원회'를 이끌게 되고, 이어진 7·8월 대투쟁의 주역이 된다. 84년 석전·용마택시를 비롯한 마창지역 택시노동자들의 격렬한 투쟁과 84·85년 삼성라디에타 노동자들의 외롭고도 끈질긴 노조결성 투쟁, 85년 최병석·주재석·이배근 등의 한국중공업 노조결성 투쟁 등도 87년 노동자대투쟁을 예고하는 전운과도 같았다.

※이 기획취재는 문화관광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 지원을 받아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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