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경남, 6월에서 9월까지 항쟁의 기록⑤ 84년의 학원자율화 투쟁사복형사 캠퍼스 상주…학원 자율화 조치 후 84년 명목상 철수, 감시는 계속경남대·경상대, 민주적 총학생회 부활 투쟁 끝에 85년 직선제

84년 5월 총학생회 부활을 위해 경남대에서 열린 공청회. 여기서 교수가 주제발표문을 훔쳐 달아나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6월항쟁 20주년기념 경남추진위 제공
◇대학에 상주하던 사복경찰들 = 요즘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84년초까지만 해도 대학 캠퍼스 안에 정보과 형사들이 '학원CP(command post)'라는 걸 만들어 버젓이 학원사찰을 하고 있었다. 여기엔 정보형사 뿐 아니라 안기부(현 국정원)나 보안사(현 기무사) 요원들도 수시로 드나들었다. 뿐만 아니라 전경들도 100~200여명이 사복으로 변장, 상시적으로 학내순찰을 하면서 감시를 했다.

83년부터 학생운동을 시작, 85년 경남대 총학생회장을 했던 김성진(전 청와대 행정관)씨는 "84년 상반기까지 학교 안 본관에 CP가 있었다. 거기엔 주로 안기부나 보안사 요원들이 있었는데, 구내전화까지 개설돼 있었다"고 기억했다. 또 그해 5월 축제기간 중 한 여학생이 반지를 잃어버렸는데, 그걸 주운 사람이 사복으로 변장해 캠퍼스에 잠입해 있던 전경이었던 해프닝도 있었다. 김성진씨는 "반지를 주웠던 전경이 내 후배여서 분명히 알고 있다"고 말했다.

총학생회 간접선거를 반대하는 경남대생의 집회. 사진 왼쪽 메가폰을 들고 있는 이가 박영주씨다. /6월항쟁 20주년기념 경남추진위 제공
경상대의 경우, 가좌캠퍼스 건물신축공사를 진행 중이던 한일개발 '함바'(はんば : 飯場 : 건설현장의 노무자 식당을 뜻하는 일본어) 안에 있었다. 당시 학원반을 담당했었던 한 경찰관에 따르면 정보과 전체 인원이 25명 정도였는데, 그 중 학원반만 7명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학교 안에 버젓이 주둔하던 사찰요원들은 83년 말 전두환 정권의 학원자율화 조치와 시국 관련 제적생들의 복교 조치 발표로 표면상 84년초 모두 철수하게 된다. <경상대학교 50년사>는 학교 안 사복경찰이 84년 2월 29일 철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학원사찰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CP는 학교 밖으로 옮겨 그대로 유지됐고, 사복경찰의 사찰활동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경상대의 경우 철수한 학원CP는 잠시 가좌동 개양사거리 검문소에 있다가 인근에 있던 한국도로공사 안에 새로운 건물을 지어 입주했다. 당시 경찰관은 "한일개발에 조립식 건물을 지어달라고 요청해 거기서 학원반 일을 했는데, 경찰만 쓴 게 아니라 다른 정보기관은 물론 시청의 여론담당 공무원도 함께 썼으며, 전화도 경남지방경찰청 직통전화를 비롯해 5대 정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경남대의 경우도 속칭 '노인정' 옆 학교 담장 바깥에 일반 주택을 한 채 임차하여 숙소로 썼고, 정문 앞 평화탕 옆 여명사라는 건물 2층에 학원CP가 존재하고 있었다. 84년 5월3일자 <경남대학보>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서울의 학원자율화에 따른 대학의 소요에도 불구하고 면학에 여념이 없던 본교 캠퍼스에도 중간고사가 실시중이던 지난 4월 19일 하오 3시경 중앙도서관 식당 6호관 1호관 다과실 등에서 5백여부의 유인물이 배포되었다. 타이프로 인쇄된 이 전단은 학원자율화와 민주화에 대한 선동적인 성격의 유인물로써, 학원사찰이 아직도 본교 정문 앞 '여명사' 2층에서 캠퍼스를 감시하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언론기본법 등의 폐지와 학원탄압 중지, 강제징집 철폐 등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84년 경남대 학생들의 학원자율화 투쟁을 경고한 총장의 공고문.

◇ 제적생 복교와 학원자율화 투쟁 = 이런 분위기 속에서 84년 대학가는 전두환 정권의 유화정책에 따른 제적학생 복교로 시작됐다. 시리즈 2편(5월 23일자 6면)과 3편(5월 30일자 6면)에서 소개된 경상대 김문규(80년 5·17조치로 제적)씨와 박영주·이재업(83년 유인물 사건으로 구속 및 제적)씨 등도 이때 복교한다. 83년 12월 23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이들은 83년 3월 7일 '복교에 즈음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는데, 다행히 마산MBC 박진해 사장이 그 성명서를 보관하고 있어 원문을 볼 수 있다. 일부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 그동안 학원에 상주해왔던 사복형사들의 철수가 발표되었다. 그러나 더욱 교묘한 방법으로 학원사찰이 행해질 것은 자명한 일이며, 이러한 가운데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할 우리의 마음은 무거울 뿐이다. 정부당국은 이번 복교조치에 대해 모든 문제해결의 책임을 자율이라는 미명아래 학교당국에 전가시키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책임회피가 아닌가? … 학교측은 우리의 의사와는 전혀 별개의 일방적 절차, 부모의견서, 본인서약서, 반성문 등을 요구하면서 이를 이행치 않으면 복교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 과연 양심마저 팽개치고 굴복하고 아부하라고 종용하는 것이, 우리 교육자들의 참모습인가? 일방적인 '베풂'과 '은혜입음'이 아니라 우리들의 빼앗긴 정당한 배울 권리를 당당하게 돌려받아야 할 것이 아닌가?"

이들의 성명에서 나타난 것처럼 복교 문제에 대해 정권과 학교당국은 일종의 '은전'이나 '시혜'로 보는 반면 제적생들은 '배울 권리의 정당한 회복'으로 보는 시각이 한동안 마찰을 빚었다. 제적생들은 나아가 복교의 선행조건으로 언론기본법과 노동법·집시법 철폐, 해직교수·해직기자·해직노동자의 복직까지 요구하기도 했다. 복교를 둘러싼 마찰과 아울러 '학원자율화'를 둘러싼 갈등도 84년 대학가를 달궜다.

앞의 <경남대학보>에 따르면 4월 23일 오전에는 학원자율 보장과 지도교수제 폐지, 언론탄압 중지, 선거법 개정 등을 요구하는 전단이 배포됐고, 26일에는 '학원자율화추진준비위원회' 명의의 유인물이 뿌려진다. '학우 여러분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유인물은 관제언론에 대한 비판과 학생자치회 부활, 어용·무능교수 퇴거, 자유로운 서클활동 보장, 대학언론의 독립과 활성화 등 7개항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이어 5월 11일과 15일에는 학원자율화를 위한 1·2차 공청회가 도서관 앞 민주의 광장에서 열렸는데, 여기서 교수들의 웃지못할 방해 해프닝이 발생한다. 5월 17일자로 발표된 유인물(마산MBC 박진해 사장 제공)에 따르면 "학교당국은 공청회 개최를 준비하던 학자추 준비위원들의 집으로 각각 연락, 이들이 마치 큰 죄나 지은 것처럼 학부모들에게 왜곡 선전하여 학부모들이 공청회 석상에 나타나 2명의 학자추 준비위원을 끌고(?) 가는 가슴 아픈 사건을 발생케 했다"는 것이다. 또 "공청회에서 주제발표를 할 예정이었던 한 학자추 준비위원의 발표원고를 공청회 개최 전 어수선한 틈을 타 모 교수가 가방에서 꺼내 빼돌린 웃지못할 촌극"도 발생했다. 학생들은 17일 오후 6시30분 전통예술연구회의 통영오광대 공연이 끝난 뒤 50여명이 <타는 목마름으로> <오월> 등 노래를 부르며 '학원자율 보장하라''직접선거 실시하라' 등 구호를 외치며 교문까지 진출, 야간시위를 벌였다.

5월 23일에는 문교부의 지침에 따른 학생장 간접선거를 학생들이 무산시켰다. 500여명의 학생들은 '직접선거 실시하라' '광주사태 해명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광주사태 희생자 위령제 및 학원자율화 성토대회를 열었다.

학생들의 간접선거 반대투쟁은 6월까지 이어지지만 학교측은 끝내 6월 16일 선거를 강행, 박홍일(일교 3)·조민규(사회 3)씨가 정·부학생장으로 선출된다.

▲84년 학원자율화 투쟁 소식을 전한 <경남대학보>.

◇총학생회 부활, 결국 85년으로 = 이렇게 민주적 총학생회 구성이 무산된 후, 2학기에도 총학생회 부활과 정권타도를 요구하는 집회를 이어간다. 9월 25일에는 학생들이 월영동 경남은행 지점까지 진출, 경찰과 투석전을 벌여 전경 10여명이 부상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 시위로 83년 제적·구속됐던 박영주·이재업씨가 또다시 시위주도 혐의로 경찰에 연행돼 구류를 살게 된다. 27일에는 이들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고, 10월 19일에는 전경 37명이 부상을 입고, 학생 9명이 연행되는 또한번의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이날 시위는 오전 학교앞 복사점에서 독도의 일본양도설에 대한 기사를 복사하던 국어교육과의 모학생을 경찰이 강제연행하려는 데 대해 해명을 요구하는데서 비롯됐다. 200명의 학생들은 오후 6시부터 밤 9시까지 '학원자율 보장' '언론자유 보장' '폭력경찰 물러가라' 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하면서 경찰과 대치, 돌을 던졌다. 이날 시위로 연행된 9명의 학생 중 김영찬(화공 4)·김성진(경제2)씨는 구류 25일, 이태환(식공2)씨는 7일의 구류를 받았고, 나머지 6명은 풀려났다.

경남대가 84년 1학기부터 복교와 총학생회 부활을 놓고 투쟁을 벌인 것과 달리, 경상대는 2학기부터 학원자율화 투쟁이 시작됐다. 11월 4일 20여개의 경상대 동아리 회장과 회원들 200여명이 모여 '동아리연합회' 발족을 결의했던 것이다. 이들은 대자보를 붙이고 유인물을 나눠주면서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학원자율화를 위한 비자율적 요소 척결을 주장했는데, 요구사항은 '동아리연합회를 학생자치기구로 인정' '학원자율화 보장, 학보 사전검열제 폐지' '대자보를 게시할 수 있는 '자유의 벽' 설치' 등이었다. 이들은 학생간부 선출을 위한 선거관리위원회를 만들어 학교측과 교섭에 나서게 되는데, 이를 둘러싼 학교측과의 갈등은 85년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렇듯 투쟁의 시발은 각각 달랐지만 민주적 총학생회 구성은 두 학교 모두 85년에 가서야 실현된다. 이때부터 학생운동은 급속한 고양기를 맞이하게 되고, 이는 87년 6월항쟁의 핵심적인 동력이 된다.

※이 기획취재는 문화관광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 지원을 받아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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