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경남, 6월에서 9월까지 항쟁의 기록④87년 이전의 농민운동

5공정권은 걸핏하면 '북괴'를 규탄하는 관제데모를 열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농민들은 자신의 권리를 자각하고 농민운동의 지평을 확장해 갔다.

"나는 농촌에서 태어나서, 농촌에서 쭉 살아왔고 … 마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오직 열심히 농사짓는 길만이 내가 잘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지. … 그러다가 어떤 친구를 통해서 임씨를 만나게 됐는데, … 헌데, 이 친구가 말하는 거는 거 대학이라 카능기 별거 아이다, 이기라. … 뭐 진짜배기 공부가 있다카이, 여기서 무슨 배울 끼 있나 하고 고개를 저었제. 그라카다가, 우연히 농촌 아카데미에 갔다 온 일이 있었습니더. 그런데 거기서 강사들이 농촌사회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 거를 한번 쓰무 보니까, 과히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애. 농민들이라 카문 될 수 있는 한 남한테 싫은 소리 안 할라능기라. 그런 생활 속에서 살다가 아 이 아카데미에서 배운대로 해보이까 우선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들이 생길 때, 반항이라카나, 그런 걸 알게 됐고, 그라면서 사람들도 많이 만나게 됐제."

위의 글은 지난 84년 <마산문화3 : 전진을 위한 만남>에 실린 '전(前) 신기농민회 회원들과의 대화'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이 글에서 한 농민이 말하는 '농촌 아카데미'는 크리스찬아카데미 농촌사회지도자교육을 뜻하고, '임씨'는 서울대를 나와 농사를 짓기 위해 귀향한 임수태(전 민주노동당 경남도당 위원장)씨를 가리킨다.

◇농민운동의 태동 = 신기농민회는 77년 11월 마산(당시 의창군) 진동면 신기리의 원예농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결성돼 누구의 도움도 없이 83년까지 외롭게 농민운동을 해온 단체다. 78년 신기농민회가 벌인 을류농지세 반대투쟁은 가장 선구적인 농민운동으로 손꼽을 만 하다.

이 투쟁은 80~81년 가톨릭농민회 경남연합회의 을류농지세 투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신기농민회는 그러나 80년 농협의 횡포를 고발하는 유인물 살포사건으로 많은 회원들이 경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고, 12·12쿠데타로 실권을 잡은 전두환 세력이 임수태씨 등을 용공조직사건으로 체포하면서 와해국면으로 몰리게 된다. 83년 신기농민회는 공식 해체됐으나 85년 의창군 전 지역에 회원을 둔 '의창군농민협회'로 거듭 태어나게 된다.

신기농민회 '을류농지세 투쟁' 선구적...거창서도 마을단위 활동 일찍이 태동

전 신기농민회 회원의 고백에서처럼 크리스찬아카데미는 경남은 물론 전국의 농민운동과 노동·시민운동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산실이었다. 79년 거창에서 '농우회'를 조직, 이후 아림농민회와 거창농민회로 발전시켜 나갔던 표만수·이상모씨 등도 크리스찬아카데미 출신(78년 20기)이었다. 역시 거창에서 초기 농민운동을 함께 한 정쌍은씨는 "내가 서울에 있을 때 크리스찬아카데미라는 곳으로 거창 분들이 교육을 왔던 것을 보았다. 그 때가 78년이었다"고 회고했다. 정씨는 80년대 초 거창에서 마을단위의 '한들농민회'를 만들어 활동했다고도 한다.

이들은 76년 거창고 교사로 와 있던 정찬용(전 청와대 인사수석), 80년 거창고 교목으로 온 유성일 목사 등과 함께 87년 6월항쟁을 군(郡) 단위에서 이끈 핵심인물이 된다. (크리스찬아카데미교육은 농촌사회 과정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마산YMCA 청년이사로 있으면서 청년단체인 원클럽을 이끈 허정도(경남도민일보 사장)씨도 75년 크리스찬아카데미 출신이었다. 또한 마산YMCA에서 전국최초로 사랑의 Y노동형제단을 만들어 80년대 초 노동자소모임을 이끌었던 황주석(작고) 간사도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과 YH노동조합의 사례를 보고 소집단운동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됐다고 한다.)

"그때의 열정, 지금은 어디로…"  
거창 민주화운동 산파역 유성일 목사
 
 

   
 
  유성일 목사  
 
"송기원이라는 소설가 선배를 잘못 만난 탓이지요. 75년 중앙대 문예창작과 재학 시절, 그 선배가 시키는대로 유신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집회현장에서 읽었다가 경찰에 잡혀갔지요."

거창 갈릴리교회 유성일 목사는 거창YMCA 출신인 정찬용 전 청와대 인사수석과 함께 70·80년대 거창지역 농민운동과 각종 사회운동의 산파이자 핵심이었고, 또한 거점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유신반대 시위와 관련, 학교에서 무기정학을 당하고 한신대로 진로를 바꿔 신학을 공부한 후 80년 정찬용씨와 인연으로 거창에 정착하게 됐다.

그는 표만수·정쌍은 등 농민운동 핵심인물들과 함께 농민회를 만들고 지역운동을 확장시켜 나가면서 농촌지역으로는 드물게 87년 6월항쟁 시위를 주도했다.

86년 갈릴리교회를 설립한 후 '어린이집'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하며 지역최초로 탁아운동을 시작했으며, 지금도 그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6월항쟁 20주년을 맞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 "그 때처럼 오직 열정 하나로 결집해서 싸웠던 그런 게 다시 나올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신자유주의와 미국의 패권주의에 적당히 타협하면서 우리 이득을 취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과연 옳은지, 이걸 깨뜨릴 수 있을 지…"하며 말끝을 흐렸다.


◇가톨릭농민회의 투쟁 = 마산 진동에서 신기농민회가 결성됐던 77년 말 가톨릭농민회(가농)도 경남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 가농은 이병철씨 등이 주도했던 고성이 중심이었다고 한다. 80년 들어 진양군 가방리 관방마을 분회와 진양군협의회가 생겼고, 을류농지세 투쟁과 마을 이장의 민주적 선출, 농협 민주화운동 등을 주도하게 된다.

경남의 농민운동이 태동한 후 처음으로 가장 크게 벌어진 투쟁은 가농 관방마을 분회의 수세현물납부투쟁이었다. 83년 11월초부터 이 마을 농민들은 추곡수매량을 늘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묵살당하자 현물(벼)로 수세(농지개량조합비)를 납부할 것을 결의했다. 이들 농민은 12월 19일 경운기 17대에 261가마의 벼를 싣고 '수세 현물 자진납부 차량'이라는 현수막을 걸고 12km 떨어진 진주시내의 진양 농지개량조합으로 출발했다. 가는 도중 온갖 방해와 구타를 무릅쓰고 조합에 도착, 잠긴 출입구의 담장 너머로 벼 가마를 던져 넣었다. 이 투쟁으로 이장이 구속되기까지 했으나 전국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한 당국이 농민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했다.

이듬해인 85년 7월에는 가농 고성군협의회 주도로 시작된 소몰이 시위가 또한번 크게 일어났다.

7월초 고성 두호마을에서 시작된 소몰이 시위 역시 관방마을을 중심으로 한 진양군협의회의 투쟁으로 이어졌다. 소를 몰고 나온 농민들과 경찰이 금산다리에서 충돌,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경찰과 농민이 서로 끌어안은 채 강에 떨어져 뒹굴면서 뼈가 부러지는 사람까지 있었으며, 10여명이 경찰서까지 연행돼 심한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이 소몰이 시위는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호주산 소를 대대적으로 수입해오는 바람에 소값이 폭락하자 이에 분노한 농민들이 궐기한 사건이었다.

이밖에도 농민들은 5공 쿠데타정권의 엄혹한 탄압 속에서도 피망 불량종자 보상투쟁, 농가부채투쟁, 추곡수매가 인상투쟁, 농협조합장 직선제 쟁취투쟁 등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며 87년까지 농민운동의 지평을 넓혀나갔다.

"노동자 자주관리회사 민주적 경영 매진"
한국 농민운동의 산 증인 정현찬씨

   
 
  정현찬 전 의장.  
 
"을류농지세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해 있을 때였죠. 가톨릭 경남교구보에 농지세에 대한 농민교육이 있다는 소식을 보고 내 발로 찾아갔습니다. 그때가 80년이었습니다."

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정현찬 의장(현 진주 시민버스 대표이사)은 83·84 수세 현물납부 투쟁과 85년 소몰이 시위로 전국에 알려진 진주시 금산면 관방마을 출신이다.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80년 가농 경남연합회에서 주최한 농민교육을 받은 후 곧바로 농민운동가가 됐다.

그 후 진주시농민회 회장과 경남도연맹 의장, 전국 의장까지 맡은 80년 이후 한국 농민운동의 산 증인이자, 87년 6월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경남본부 공동대표와 이후 민주주의민족통일 서경연합 의장 등을 지낸 진주와 서부경남지역 민주화운동의 대부 같은 인물이다. 지금은 6월민주항쟁 20주년 기념 서부경남추진위 상임대표와 경남추진위 공동대표 등을 맡고 있다.

그는 또 노동자 자주관리기업으로 거듭난 진주시민버스의 대표이사를 맡아 민주적 경영의 모델을 만들어나가고 있기도 하다. 인터뷰 중에도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전화로 정말 바빴다.

그에게 지금 가장 절실한 게 뭐냐고 물었다.

"시민버스를 자주관리기업의 성공적 모델로 만드는 겁니다. 민주세력의 능력을 입증해야죠. 회사 경영도 민주적으로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당장 저에게 주어진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농민운동과 문화운동의 결합 = 이 시기의 농민운동 과정에서 특이한 일이 있었다. 마산의 청년들이 진양 관방마을 농민들과 결합, 수세 현물납부 투쟁을 마당극으로 만들어 공연을 한 일이었다. 70년대 말 마산 '불씨극회' 출신으로 부마항쟁에 참여하고 80년대 초 경남대 학생운동의 중심에 있던 박영주씨가 대본을 쓰고 한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문기훈, 한희진씨 등 청년·학생 15명 가량이 '농(農)풀이'라는 마당극을 84년 6월말부터 3개월에 걸쳐 연습한 후, 8월 18·19일 관방마을과 문산성당에서 공연했던 것이다. 이 공연을 경찰이 저지하는 과정에서 일행이 연행되고 폭행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자 진주경찰서에서 항의하는 연좌농성을 벌여 서장의 공개사과를 받아내기도 했다고 한다.

이 마당극의 준비 및 공연과정과 대본은 <마산문화> 3집에 그대로 실려 있는데, 경남지역 최초의 농-학연대 사례이자 문화운동과 농민운동의 결합이었다는 의미를 가진다.

한편 거창에서도 유성일 목사 등의 연결로 연세대 학생들의 '농활'이 83년부터 시작되고, 이 농활대의 풍물강습 영향으로 거창읍에 살던 청년 한대수씨가 84년 우리문화연구회를 만들어 농민운동과 결합을 시도하게 된다.

이같은 종교와 농민, 청년·학생의 결합은 87년 6월항쟁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이 기획취재는 문화관광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 지원을 받아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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