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8주년특집]87년 경남, 6월에서 9월까지 항쟁의 기록③
암흑 속에서 민주화 새벽을 준비…87년 6월항쟁 매개 역할80년 5·17 이후 지하로 숨어든 운동권, 소모임 통해 사회학습

◇70년대와 80년대의 만남 <마산문화> = 전두환 정권의 폭압통치가 한창이던 82년, 매서운 찬바람이 휘몰아치던 '겨울 언덕에 서서' 민주화의 싹을 틔우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주대환, 박진해, 서익진, 박영주, 이태수 등이 만든 <마산문화>가 그것이다. 80년 신군부의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이어진 광주학살, 81년 6만 명 이상을 체포, 감금했던 삼청교육대 지옥훈련 등으로 온 사회가 꽁꽁 얼어붙어 있던 시절이었다.

82년말 발간된 부정기간행물 <마산문화> 1호 '겨울 언덕에 서서'는 80년대 최초의 노동소설 '수출자유지역의 하루'(최순임, 본명은 주식회사 삼미의 고경엽), 비판적 시인 이선관의 시세계를 소개한 '이선관 시론'(박진해), 문화운동의 현황을 짚은 '마산 동신제와 지신밟기'(박진해), '마산연극의 흐름'(박영주), '마산의 청년문학 동인활동'(이재업), 그리고 '민족·민주주의·민족해방운동'(서익진), '알제리 민족해방전쟁'(김종철), '니카라구아에서의 해방전쟁'(번역물) 등 당시로선 불온하고도 위험한 글들이 실려 있다.

1호 편집장을 맡았던 박진해는 80년대 초의 암울했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광주학살의 피를 머금고 치솟은 전두환 5공정권의 반동적인 일방통행을 손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무기력함에 모두는 전율하고 절망해야만 했다. 한참동안의 강요된 침묵과 개인차원으로 분리된 침잠의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나 1982년 언저리로 접어들면서 새로운 움직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경남양서보급회 집현전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소모임 형태로 모이면서 한국근대사에 대한 세미나가 진행되었고, 경남대와 창원대, 창원전문대 등에서는 탈춤과 마당극을 통해 시련을 딛고 일어서는 신명과 민중의식을 체현하고자 하는 몸짓도 있었다. 아울러 청년문학도들과 일부 노동현장에서 시문학동인 활동이 태동하기도 했다."(마산·창원지역사연구회, <마산·창원역사읽기>, 불휘, 2003)

절망 속에서 움튼 이런 맹아(萌芽)를 계속 살려나가기 위한 거점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당시 마산YMCA 황주석·이상익 총무와 요가운동가 신석규씨가 이끌던 기독교장로회 한교회와 연극인 김종석씨가 운영하던 맷돌소극장을 거점 삼아 새로운 저항의 방식으로 무크(MOOK : 부정기간행물)지 운동을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마산문화>였던 것.

책은 1500부 모두가 유가로 판매될 정도로 잘나갔다. 그러나 발행인과 편집인은 안기부와 경찰서 정보과에 불려다니며 용공성 여부를 취조당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책은 85년 4호까지 꾸준히 발행됐다. 4호를 끝으로 발행이 중단된 것은 이유가 있었다. 그땐 이미 80년부터 물밑에서 '학습'을 통해 새로운 항쟁을 준비해온 이들이 노동·농민·학생 등 각 부문별로 군부독재 타도운동을 다시 시작했고, 그런 상황에서 더 이상 무크지로서는 저항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마산문화> 편집진으로 참여했던 이들도 흩어져 자기 분야의 운동에 매진하게 된다. 주대환이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위해 서울로 떠난 것도 86년 1월 1일이었다.

이렇듯 <마산문화>는 70년대 학생운동권이 사회에 나와 80년대 운동권과 맺어짐으로써 79년 부마민주항쟁과 87년 6월항쟁을 잇는 매개 역할을 했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할 것이다.

대학학군단 내 무기고.
◇대학가 '학습' 소모임들의 물밑 모색
= <마산문화> 편집진과 필진 가운데 특히 박영주와 이재업은 각각 경남대 휴학생과 재학생으로서 교내 학생운동 인사들과 연결고리가 됐다. 80년 5·17 이후 모든 운동세력이 지하로 들어갔지만, 학생들은 마냥 좌절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80년 하반기부터 몇몇 사람들이 소모임 형태로 모여 과학적인 사회인식을 위한 '학습'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은 79년 부마항쟁과 80년 투쟁의 실패에서 얻은 오류를 극복하고 보다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목표로 했다. 부마항쟁의 주역 중 한명이었던 김종철과 박영주, 그리고 경남대 78학번 박성원, 한국외대를 졸업하고 귀향한 김동민 등이 합류했고, 이후 경남대 김성진, 진현경, 허태유, 마산대(현 창원대) 박유호 등도 가세하게 된다. 물론 이들의 모임과 별도로 더 많은 학습 소모임들이 있었을 것이지만 기록으로 남아 있는 건 없다.

경상대와 마산대에서도 81~82년 하나 둘 학습모임들이 '언더(지하)'에서 물밑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경상대의 오갑수(82학번), 마산대의 김경영(82학번) 등이 그들이다. 물론 이런 소모임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부마항쟁 세대에서부터 이어진 경남대를 제외하고 경상대나 마산대의 경우 81학번들이 2학년이 되던 82년쯤부터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해 83·84년 제적학생 복교조치와 대학캠퍼스 사복경찰 철수를 계기로 급속히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83년 경상대에서는 최초로 '의식화' 문제로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는 사건이 있었다. 경상대가 발간한 <경상대학교 50년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5월 4일 배충환(영문학과 2년) 등 6명이 지하 동아리를 만들려 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연행되는 일이 일어났다. 배충환은 무기정학 처분을 당하고 나머지 5명(남학생 3명, 여학생 2명)은 경고처분을 받았다. 이 학생들은 그들 나름대로 바람직한 대학생활의 의미를 찾고자 했고, 또한 대학생으로서 폭넓은 교양을 갖추기 위하여 <지식인을 위한 변명>, <우상과 이성>, <일제 잔재세력의 정화문제>,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 사회과학서적들을 82년 8월부터 읽고 토론하여 왔다고 주장하였다."

83년 경남대생들이 전방경계 훈련을 떠나는 모습. 5·17조치 후 84년 유화국면까지 대학가는 병영이나 다름없는 통제사회였다.
◇지도휴학·강제징집·제적
= 이 사건에 이어 8월에는 오갑수 등 4명(경상대 4명, 진주교대 1명)에 의한 이념동아리 활동이 정보기관에 또 적발됐다. 이들은 82년 3월부터 매주 1~2회의 독서 및 토론회를 가졌으며, 이들이 읽은 책들은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민중과 지식인>, <전환시대의 논리>, <해방전후사의 인식>, <자본주의 발전 연구>, <철학이란 무엇인가>, <변증법적 유물론은 무엇인가> 등이었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MT 등을 통해 의식화를 했으며, 83년 5월에는 광주항쟁에 관한 유인물을 작성, 강의실과 캠퍼스 내에 뿌리기도 한 혐의를 받았다. 이들은 경찰에 연행된 후 다시 진주지역 보안대로 옮겨져 5일간 조사를 받은 결과 오갑수 등 2명은 군에 강제징집됐고, 황모(의과대학 1년)는 권고휴학, 신모(진주교대 2년)는 제적됐다.

이밖에도 기록으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기동, 전강석, 하경보 등 사회학과와 거창고 출신 박영곤 등 81학번을 중심으로 하는 소모임도 있었다. 이들은 82년 5·17조치 이후 처음으로 학내문제를 들고 경상대 칠암캠퍼스에서 교내시위를 벌이기도 했다고 전한다. 이들 중 이기동은 83년 2학기 때 경찰에 발각돼 조사를 받고 지도휴학을 당한 후 군에 입대하는데, 그는 "81년도에도 법경대 안에 '카오스'라는 언더팀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는 "부산대에서 학생운동을 하다 중퇴하고 진주에 온 최재기씨도 따로 언더팀을 하고 있었고, 시내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던 주형식씨도 그랬던 것으로 안다"면서 당시 알게 모르게 학습모임이 많았다고 했다.

역시 기록에는 없지만 83년 하반기에는 경상대 '풀무회 사건'도 있었다. 풀무회는 70년대부터 있었던 서클이었는데, 당시 경찰 관계자였던 ㄱ씨는 "교내 화장실에 반정부 낙서를 하고 다닐 때였는데, 풀무회라는 학내 서클 회원들이 의식화 학습을 해 온 결과"라고 기억했다. 경찰과 보안대 등에 의해 발각돼 조사를 받았는데, 구속에 이르진 않았지만 그땐 그 자체가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또 당시 진주에는 삼현여고 교사로 있던 조창래(영남대 73학번)씨와 경상대 정대성·김금성·권춘현·김현규 등을 중심으로 하는 소모임도 있었다. 조창래씨와 권춘현씨 등에 의하면 이들 역시 82년 즈음부터 진주 중앙시장 닭집골목과 정촌면 예하리 자취방 등에서 '학습'을 했다고 한다. 이들은 이후 85년 여름을 지나면서 공개적으로 '넝쿨'이라는 이념서클을 만들게 된다. 넝쿨과 풀무회는 각기 '오픈(공개)' 조직과 '언더(지하)'로 이원화된 형태로 운영되면서 이후 84~86년 경상대 학생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반정부 유인물 살포사건 = 이에 앞서 마산에서는 83년 3월 14일 반정부 유인물 배포사건이 발생한다. 밤 10시30분쯤 경남대·마산대(현 창원대)와 시내에 1000여장의 유인물이 뿌려졌는데, 범인들은 28일 경찰에 붙잡히게 된다. 박영주(경남대 경제학과 휴학생)·이재업(경남대 기계설계학과 4학년)·유경호(계명대 졸업생) 등 3명이었다. 이들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구속돼 1심에서 징역 1년6개월, 2심에서 2년을 선고받고 복역중 그해 12월말 전두환 정권의 유화조치로 석방됐다. 특히 이 사건은 경상대의 이념동아리 사건과 함께 80년 5·17 이후 경남 최초의 시국사건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84년이 되면 안정적인 군부독재 체제를 확립한 전두환 정권이 자신감을 얻은 듯 구속학생 석방과 제적생·해직교수 복직 등 유화〉조치를 취하면서 대학가도 활기를 띠게 된다. 84년 2월에는 학내에 진주하고 있던 사복경찰도 학교 밖으로 철수한다. 시리즈 2편(5월 23일자 6면)에서 언급된 5·17사태 당시 경상대 제적생 김문규씨도 이때 복교한다. 또한 마산 유인물 사건으로 구속됐던 박영주씨 역시 경남대로 복교하게 된다.

이렇듯 87년 6월항쟁은 5·17 직후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언제 올지 모르는 항쟁을 예비음모하면서 암중모색을 해온 수많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김주완 기자 wan@idomin.com

/사진출처: 사진으로 보는 경남대 56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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