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8주년특집]87년 경남, 6월에서 9월까지 항쟁의 기록②
80년 짧았던 봄…민주화 꿈은 짓밟혔지만경상대·경남대·마산대생 "비상계엄 철폐" 격렬 시위마창지역 노동자들도 노조 결성 통해 억눌린 요

80년 5월 교문 밖으로 진출하는 경남대 학생들.
79년 10월 26일 독재자 박정희가 죽었다. 총을 쏜 사람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였지만, 그의 '거사'를 있게 한 것은 부산·마산시민의 10월 민주항쟁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18년 유신독재가 끝나고 민주화된 세상이 올 줄로 믿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11월 24일 유신독재 부활조짐을 경고한 '명동 YWCA 위장결혼식 사건' 참석자들을 무더기 구속시키더니, 12월 12일에는 전두환 일당이 기어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짧았던 민주화의 봄 = 이 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민주화의 봄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실제로 80년 봄이 되자 대학가와 노동계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군부와 최규하 정권은 기존 학도호국단 체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간부선임권만 선거 체제로 바꾸도록 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를 거부하고 총학생회 부활을 밀고 나갔다.

경남도내에서도 3·4월 경남대와 경상대에 각각 '총학생회 부활 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최초의 직선 총학생회장을 선출했다. 경남대는 4월 4일 이용석(법학과 3학년)씨, 경상대는 같은 달 중순 정민화(임학과 3학년)씨가 각각 선출됐다.

경남대생들이 거리를 행진하며 비상계엄 해제와 과도정부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경남대 학생들의 시위는 직선 총학생회가 출범하기도 전, 다소 엉뚱한 데서부터 시작됐다. 3월 25일자 서울 연세대 학보 <연세춘추>에 실린 기사가 발단이었다. '4·19 불붙었던 마산, 이제는 퇴폐적 유흥도시로'라는 제목의 기사가 학생들의 자존심에 불을 지른 것. 4월 1일 국어교육학과가 주축이 된 200여명의 학생들은 본관 앞에서 성토대회를 열어 마산의 대학생과 마산시민들을 의도적으로 모욕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2일에는 무려 3000여명이 모여 연세대 총장 화형식을 갖고, 총장 사퇴와 전 매스컴을 통한 공개사과문 게재, 신문의 회수 등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4일에도 2000여명의 학생들이 성토대회를 갖고 가두까지 진출, 시위를 계속했으며, 같은 날 부산대에서도 마산 출신 학생 200여명이 모여 '마산시민을 모독한 연세춘추의 왜곡보도 규탄대회'를 열었다. 이 사태는 8일 연세대 부총장 일행이 경남대와 마산시를 방문, 공식사과함으로써 일단락된다.

<연세춘추> 사태 한달 뒤인 5월 7일, 경남대에서는 총학생회 주최로 부마항쟁 이후 처음으로 민주화를 내건 시위가 벌어진다. 경남대생 1000여명은 학교 운동장에서 '비상계엄 해제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 '어용교수 물러나라' '언론자유 보장하라'는 등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인 후, 비상학생총회를 열어 시국문제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회에서 학생들은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무기한 철야농성을 하기로 하고 도서관 앞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6월항쟁기념사업 경남추진위 박영주의 메모, 당시 학생회장 이용석의 증언)

◇마산 이어 진주의 '남강도하작전' = 진주에서도 마산보다 하루 뒤인 8일과 9일 경상대 법경대와 이공대·농과대 학생들이 학내 문제를 제기하며 시위를 벌였으며, 12일에는 경상대 역사상 4·19 이후 최초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다. 오전 10시 칠암캠퍼스에서 총학생회 주최로 열린 시국성토대회에는 1500여명의 학생이 모였다. 이들은 '시국선언문' 낭독에 이어 "유신잔재세력이 이 땅에 발붙일 수 없는 것이 역사의 당위이며, 권력에 결탁하여 치부해온 재벌들을 규탄한다. 그리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력히 촉구한다"는 정치인과 문교부 장관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했다. 이어 정오부터 교외로 진출하려던 학생들은 전경들과 대치하던 중, 전경이 쏜 최루탄에 한 학생이 쓰러졌다. 격분한 학생 1500여명은 가뭄으로 수심이 얕은 학교 동쪽 남강을 바지를 걷고 건너 시내로 진출했다. 경상대 학생운동사에서 '남강도하작전'으로 일컬어진 이 시위에서 시내로 들어가던 중 진양교와 뒤벼리에서 또다시 전경들과 충돌, 학생과 교수, 전경 등 6명이 다치기도 했다.

경남대에 진주한 비상계엄군의 회의 모습. 당시 계엄군이 주재하는 회의에 대학관계자들도 강제로 참석해야 했다.
학생들은 진주시청 앞까지 진출하여 '유신잔당 정치생명 완전 청산', '매판경제구조 철폐', '사북탄광, 동국제강, 생존 투쟁자 석방', '언론의 제기능 확보'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 약간명이 경찰에 연행됐으나 곧 석방됐다. 학생들은 다시 학교로 돌아와 교수들의 귀가 권유를 뿌리치고 단과대학별로 모여 '매판 경제구조 타파', '대학의 정통성 확립' 등에 대한 토론회와 '정치인 모의재판' 등을 진행하며 철야농성을 벌였다.

경상대생들은 이튿날인 13일에도 다시 칠암캠퍼스 중앙광장에 모여 평화적인 교내시위를 하기로 하고, '비상계엄 철폐', '관제언론 각성', '군부의 중립', '노동3권 보장', '민주화 일정 밝혀라' 등 11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일부 정치인들의 화형식을 가진 뒤 자진해산했다. (경상대, 경상대학교 40년사, 1988)

◇5·17과 5·18로 짓밟힌 꿈 = 학생들의 시위는 15일 다시 마산으로 이어졌다. 특히 이날 마산은 경남대와 마산대학(현 창원대) 학생들이 연합시위를 벌였다. 경남대생 3000여명과 마산대생 500여명이 오전 11시 교정에서 시국성토대회를 열고 '4·19 정신 계승'과 '언론은 각성하라'는 등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낮 12시 교문을 나서 마산시청을 거쳐 3·15의거탑까지 평화행진을 벌였다. 16일에도 경남대생 1000여명과 마산대생 200여명은 마산시내 창동에서 집결, 계엄철폐 등을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80년 민주화의 봄'은 짧았다. 다음날인 17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5·17쿠데타'로 불리는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통해 주요 도시에 탱크와 무장병력을 투입하고 모든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또 주요대학 학생회 간부에 대해 전원 검거령을 내림으로써 사실상 학생회 조직을 와해시켰다.

시위 진압을 위해 경남대 앞에 출동한 경찰차량. 사진/사진으로 보는 경남대학교 56년
앞의 시위를 주도했던 경남대와 경상대 학생간부들에게도 검거령이 내려졌다. 경남대 이용석 회장을 비롯한 20여명의 간부들이 5·17과 함께 보안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고, 경상대도 '남강도하시위'의 책임을 물어 정민화 회장과 김옥정 부회장 등 간부 수십명이 구속돼 수사를 받고 구류를 살았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앞선 총학생회 선거 낙선자인 김문규(낙농학과 3)씨 등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구속돼 오랜 고초를 받았다. 결국 김문규와 정홍기(낙농학과 2)씨는 제적되고 수명이 학사징계를 받게 됐다.

◇노동자들도 나섰지만 = 80년 봄의 민주화 요구는 대학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마창지역 노동자들도 이 기간 임금인상과 체불임금 해소, 작업조건의 개선,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항의 등을 쟁점으로 억눌린 요구와 분노를 분출했다. 마산 한국삼양공업, 신흥화학, 동경전자, 두산유리 등과 창원의 현대양행, 동양기계, 풍성정밀, 동명중공업, 한국공작기계, 삼성라디에타, 창원산재병원, 진해의 진해화학 등에서 작업거부와 농성, 파업이 전개됐고, 창원 세신실업과 마산 두산유리, 수출지역의 (주)북릉, 정상화성, 한국쌍엽정밀 등에서 신규노조가 결성됐다. (김하경, 내사랑 마창노련, 갈무리, 1999)

이런 노동운동 역시 5·17 쿠데타와 이어진 광주학살로 모두 지하로 숨어들게 된다. 대학에는 계엄군이 들어와 학사행정까지 통제를 했고, 수많은 노동조합이 강제해산됐으며 학생회는 다시 학도호국단으로 재편됐다. 군부정권은 무자비한 학살과 연행, 구금, 수배, 고문은 물론 '삼청교육대'와 '언론통폐합' 등을 거쳐 한국사회를 장악했다.

정치·사회적으로 다시 기나긴 겨울이 시작됐다. 그러나 민주화의 열정마저 모두 식은 것은 아니었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 속에서도 82년 마산에는 결코 식을 수 없는 민주주의의 열정을 담은 책 한권이 등장한다. 무크지 <마산문화>가 그것이다. 79년 '부마항쟁'과 80년 '민주화의 봄'을 거치면서 사회의식을 단련한 이들이 만든 <마산문화> 1호의 제목은 <겨울 언덕에 서서>였다. 군부의 폭압통치는 그야말로 매서운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겨울 언덕, 그것이다.

87년 6월항쟁과 이어진 노동자대투쟁은 이미 80년 국민의 민주화 요구가 신군부에 의해 짓밟힐 때부터 배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기획취재는 문화관광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 지원을 받아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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