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8주년특집]87년 경남, 6월에서 9월까지 항쟁의 기록①

<이 기획취재는 문화관광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 지원을 받아 이뤄졌습니다.>

20년 전, 우리의 요구는 정말 소박했다.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가 87년 노동자 대투쟁 기간 내내 가장 많이 외친 구호였다. 6월항쟁에서도 핵심요구는 '대통령 직선제 쟁취'였고, 구호는 '호헌철폐''독재타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단순하고도 당연한 요구였지만, 그걸 쟁취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최루탄 가스를 들이마셔야 했고,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거나 경찰에 끌려가 얻어맞아야 했다.

◇6월항쟁의 수혜자들 =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노동자가 그나마 '인간 취급'을 받고,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수 있는 것도 그 때 피흘린 사람들의 덕택이다. 그뿐인가. 세월을 잘 만나 시의원이 되고 군의원이 되고, 민선 시장·군수가 되고 도지사·교육감이 된 분들도 6월항쟁 덕분에 부활된 지방자치·교육자치의 수혜자라 볼 수도 있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20년 전 '항쟁의 역사'를 아무 거리낌없이 기획취재·보도할 수 있는 것도 그 때 쟁취한 언론자유 덕택이며, <경남도민일보>의 창간 자체도 6월항쟁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에 의해 '1도 1사'의 혜택을 누렸던 <경남신문>도 마찬가지다. 언론노동조합이 결성되고 나름대로 이만큼의 편집권 독립을 누릴 수 있는 것도 그 때 '관제언론 타도'와 '언론자유 보장'을 외쳐준 시민들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하지만 불행하게도 당시 유일한 지역신문의 보도는 철저히 반(反)시민, 친(親)독재로 일관했다.

고속도로에서 LPG차를 탈취, 경찰과 대치한 경상대생들의 투쟁을 보도한 당시 <조선일보> 1면.
진주를 비롯한 지방의 격렬한 시위를 보도한 <조선일보>.
경찰의 고문으로 살해된 고 박종철군의 49재에 맞춰 열린 '3·3추모 평화대행진' 당일 이 신문의 사설 제목은 '가두시위 언제까지 - '3·3 정치 대행진'의 우려'였다. 이 사설은 "이른바 '3·3대행진'은 정치적 위기감을 부채질하면서 가뜩이나 스산한 국민들의 가슴에 또한차례 불안한 회오리 바람을 몰아붙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전두환이 4·13 호헌조치를 발표한 날에는 사회면 머리기사로 '안보·안정 다지는 불가피한 조치'라는 타이틀과 '전 대통령 특별담화 각계반응'이라는 명패 하에 '점진적 민주화 개혁 큰 기대' '국력낭비·군론분열 막을 결단' '정치·경제발전 새 계기 삼아야'라는 부제로 정권에 아부하고 있다.

◇시민 배신한 지역언론 =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대검과 치안본부 등 공안기관의 '시위 엄단' 방침을 1면과 사회면에 대서특필하면서 대학가의 시위를 '지성에 먹칠한 폭력시위'(5월 7일자 사설)라고 매도했다. 6월항쟁이 본격적으로 불붙은 6·10대회 전날에는 '불법집회 국민이 용납못한다'는 사설로 시위저지에 안간힘을 썼으며, 남홍 논설위원이 쓴 '경남시론-국민은 길거리정치를 원치 않는다'는 글을 통해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는 민정당 전당대회를 '민족사적인 과업'으로 치켜세우면서 "민정당 전당대회일에 재야, 민주당이 소위 '국민대회'를 여는 것은 정치도의를 외면한 책동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강변한다.

사회면에 2단으로 마산 6·10항쟁을 보도한 <경남신문> 기사.
10일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날 사설은 '민주정착의 역사적 전환점 -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에 큰 기대'였다. 그러나 같은 날 전국에 생중계 중이던 한국 대 이집트간의 국제 축구경기가 중단되고 3만명이 시위를 벌인 마산 6·10대회를 사회면 2단 크기로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한(韓)·에(埃)축구경기 중단 / 차량방화 기물 파손' '마산서도 시위…시민반응 냉담'.

그날 사설에서는 '6·10 이후의 정국'이라는 제목 아래 "시위와 저지의 악순환은 여야 공히 도움되는 것은 없고 국민들의 불신만 높여줄 뿐이다. 그리고 우리의 헌정사를 뒤돌아볼 때 대통령 단임의 확정만 해도 획기적인 정치발전이 아니겠는가. 욕심을 부리자면 한이 없는 것이고, 우리가 분수를 알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설파했다.

마산 6·10항쟁과 같은 날 <경남신문>에 실린 노태우 민정당 후보 풀스토리.
그러나 이같은 언론의 왜곡보도는 오히려 시민의 불타는 가슴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됐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경남본부(국본 경남)는 <민주경남>이라는 유인물 형식의 소식지를 만들어 6·10대회를 전하면서 관제언론을 질타했다. 시민들의 투쟁은 노태우가 6·29선언을 발표하기 하루 전날까지 계속됐다.

◇독재정권에 결정타 날린 경남 = 특히 경남지역의 투쟁은 6월항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6월 10일 마산에서 한국-이집트간 축구대회가 최루탄 가스에 중단되는 장면이 전국에 생중계됨으로써 전국민적 참여를 확산시키는 촉매제가 된 데 이어, 17일 진주에서 고속도로를 점거하는가 하면 LPG차 2대를 탈취, 경찰과 대치한 사건은 시위가 혁명적 양상으로 전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경상대생들은 고속도로에서 LPG차량에 올라 횃불을 들고 '죽자, 죽자'를 외치며 시내 쪽으로 나아갔다.

진주의 LPG 차량시위는 이튿날 <조선일보> 1면과 사회면에 머리기사로 대서특필되면서 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마산에서도 26·27·28일 시위에 리어카행상과 택시노동자, 술집에서 나온 주당들까지 가세하면서 돌과 각목·화염병이 등장하는 등 혁명적 상황으로 번져 나갔다.

이처럼 시위가 혁명으로 진화되는 조짐을 보이자 위기감을 느낀 전두환 정권은 결국 노태우를 앞세워 8개항의 요구를 수용하는 모습을 취하기에 이른다. ①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통한 1988년 2월 평화적 정권이양 ② 대통령선거법 개정을 통한 공정한 경쟁 보장 ③ 김대중(金大中)의 사면복권과 시국관련사범들의 석방 ④ 인간존엄성 존중 및 기본인권 신장 ⑤ 자유언론의 창달 ⑥ 지방자치 및 교육자치 실시 ⑦ 정당의 건전한 활동 보장 ⑧ 과감한 사회정화조치의 단행이 그것이었다.

1987년 6월 15일 경상대 학생들이 진주시청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시민과 학생들이 6월항쟁 승리의 기쁨에 일시 도취해 있는 동안 이 과정에서 각성한 노동자들은 보다 근본적인 민주화 투쟁에 돌입한다. 이것이 바로 9월까지 계속된 7·8·9 노동자 대투쟁이다. 이 투쟁으로 인해 해방이후 변혁운동의 주체였던 학생들을 대신하여 노동자가 역사발전의 주축으로 새롭게 자리잡았고, '노동자도 사람으로 대접받는 사회'가 됐던 것이다. 이처럼 6월항쟁이 87년의 1단계 민주항쟁이었다면, 노동자 대투쟁은 보다 근본적인 민주주의를 쟁취하려는 2단계 항쟁이었다. 따라서 1·2단계 항쟁은 한국사회 민주화의 단계에서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경남도민일보는 6월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20주년을 맞아 87년 체제를 뛰어넘는 한국사회의 새로운 레짐체인지(regime change·정치체제 재편)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매주 1회 20차례에 걸쳐 그날의 역사를 기록하고 성과와 한계를 따져보려 한다. 이를 통해 20년 전 '독재타도'와 '어용노조 퇴진' 요구를 한 단계 뛰어넘는 2007년형 과제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독자와 함께 고민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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