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중국 통해 국수 만드는 법 전수…귀한 밀가루 대신 메밀로 만든 것이 시초

냉면(冷麵)의 주재료는 메밀이다.

남한에서 전분으로 국수를 뽑은 함흥 농마국수를 함흥냉면이라고 하지만 북한에서는 농마국수 또는 함흥회국수라고 하지 냉면이라고는 안 한다.

이북에서 피란 온 사람들이 평양냉면의 유명세에 힘입어 함흥 농마국수나 회국수를 함흥냉면이라는 이름으로 비빔냉면을 만들어 팔면서 남한에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아언각비>에는 '메밀을 교맥(蕎麥) 또는 수맥(收麥)이라 하고 교맥을 목맥(木麥) 곧 메밀(毛蜜)이라고 하는데, 교맥이 모가 져 있기 때문에 메밀이란 이름이 이어지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메밀의 원산지는 중앙아시아이며, 위로는 바이칼 호수로부터 몽골, 한반도, 일본으로 이어지는 동이족(東夷族) 계통의 곡물로서 황근(黃根:노란뿌리), 홍경(紅莖:붉은줄기), 청엽(靑葉:푸른잎), 백화(白花:흰꽃), 흑실(黑實:검은열매)까지 각기 다섯가지 오방색을 가진 오방곡물 또는 오방지영물(五方之靈物)이라고 한다.

메밀은 파종에서 수확까지 생육기간이 짧고, 돌이 많고 척박한 땅에서도 자라므로 하늘에서 비를 내려줘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천수답에서 가뭄으로 파종시기를 놓치면 메밀을 심었기 때문에 주로 산간지방에서 메밀농사를 많이 했다.

'고려시대 중국으로부터 밀로 국수 만드는 방법을 배웠으나 우리는 메밀로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고려도경>

당시는 밀을 중국으로부터 수입을 해 귀했으므로 밀가루 보다는 메밀로 국수를 해 먹었다.

이렇듯 전국의 산간지방에서 생산되는 메밀로 만든 메밀묵과 메밀국수는 우리의 오래 된 먹을거리였으며, 특히 평안북도 산간지방이나 합천을 비롯한 경상남도 산간지방의 메밀국수는 평양이나 진주의 기생문화와 접목되면서 냉면이라는 이름을 얻어 기생들이 손님을 앞세워 심야에 즐겨 찾던 야참음식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냉면이 문헌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최초의 기록은 1849년에 씌어진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로 "겨울철 시식(時食)으로서 메밀국수에 무김치, 배추김치를 넣고 그 위에 돼지고기를 얹은 냉면이 있다"고 기록되었다.

그리고 1896년에 씌어진 연세대본 <규곤요람>의 '냉면'에는 "싱거운 무 김치국에다 화청(和淸)해서 국수를 말고 저육(猪肉:돼지고기)을 잘 삶아 넣고 배와 밤과 복숭아를 얇게 저며 넣고 잣을 떨어 나니라"라고 기록 되었다.

한편 1800년대 말 저자 미상의 <시의전서> 냉면편에는 "청신한 나박 김치나 좋은 동치미국에 말되 화청하고 위에 양지머리, 배 좋은 배추통김치를 다져 얹고 고춧가루와 잣을 흩어 얹는다"고 기록되어 있고 "고기장국을 싸늘하게 식혀서 국수를 마는 장국냉면도 설명하고 있다.

◇ 냉면 마니아 고종황제의 궁중냉면

궁중의 잔치 기록인 <진찬의궤>나 <진연의궤>를 살펴보면 궁중 잔치 고임상에는 반드시 국수가 올라갔고 주로 온면을 올렸다.

그러나 1848년 3월 순조비의 육순 축하잔치와 1873년 강령전(康寧殿) 화재로 소실된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1874년 4월에 연 축하잔치 두 차례 잔치에 냉면을 만들어 올렸다.

이 두 잔치에 올라간 냉면재료를 보면 메밀국수, 양지머리, 돼지머리, 배추김치, 배, 꿀, 잣 등이다. 다만 1874년 4월 잔치의 냉면에는 고춧가루를 더 사용했다.

한편 고종 10년 (1873년)에 씌어진 <진찬의궤>에 나타난 재료를 보면 "냉면 한 그릇(冷麵 一器), 목면(木麵:압착기를 이용한 면발) 30사리, 김치 5그릇(器), 돼지다리 3분(分) 1부(部), 배 3개(個), 잣 5작(勺), 고춧가루 1합(合)"이라 씌어 있다.

조선 역대 왕중에 냉면을 즐겼던 분으로 식도락가라 할 만큼 음식 맛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셨던 분은 고종황제였다고 한다.

고종황제는 맵거나 짠 것을 드시지 않으셨던 관계로 냉면을 즐기셨다고 한다.

당시 고종황제가 드셨던 냉면의 사리는 대한문 밖 국숫집에서 사다가 썼으며, 꾸미는 가운데 열십자로 편육을 위에 얹고 나머지 빈 곳에 배와 잣을 덮었다.

배는 칼로 썰지 않고 반드시 수저로 얇게 저며 얹었고 배를 많이 넣고 담가 무척 달고 시원했다고 고종황제의 총애를 받던 삼축당(三祝堂)이 전한다.

고종황제가 즐겨 드셨던 궁중의 냉면이 일반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이 망하고 당시 궁중의 음식 책임자였던 안순환(安淳換)이 왕궁의 숙수와 기생을 모아 놓고 세종로의 동아일보 자리에 '명월관'이라는 조선요릿집을 차려 놓고 선을 보였으며, 이 명월관 냉면이 <부인필지>라는 책에 소개되었던 것이다. 이 책에도 "동치미 국물에 국수를 말고 무와 배, 유자를 얇게 저며 넣고 후추, 배, 잣을 넣는다"라고 기록되었다.

/김영복(경남대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장)

조선 원진스님 일본으로 전파 '메밀국수'가 '소바키리'로  
 
헤이안 시대에 당(唐)나라에서 홍법대사라는 승려가 밀과 동시에 우동의 제법을 가지고 왔다는 설(說)이 있다. 소면은 무로마치 시대 이전부터 있었고 , 우동은 무로마치 시대에 번성했었던 것으로 보고 있으나 이는 논리를 뒷받침 할 만한 자료가 없이 근대 일본에서 주장하는 설(說)에 불과하다. 에도시대 초기 이전에는 삶은 소바(메밀)를 그냥 쯔유에 찍어서 먹기만 하다가 에도 초기에 뜨거운 국물을 부어서 먹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일본 소바키리(そば切)는 제면기술의 발달 전에는 소바(そば)가루에 뜨거운 물을 넣어 직접 반죽해 먹는 소바가키(そばがき)를 먼저 먹었다고 한다. 일본의 본산적주(本山荻舟)에 의하면 "일설(一說)로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년) 초엽에 조선의 승(僧) 원진(元珍)이 남도 (南都) 동대사(東大寺)에 건너 와서 연결제(連結劑)로서 밀가루를 메밀가루로 섞는 것을 가르치므로 비로소 일본에 메밀국수가 보급되었다"고 기록되었다. '헤이안 시대에 당(唐)나라에서 홍법대사라는 승려가 밀과 동시에 우동의 제법을 가지고 왔다는 설(說)과 소면은 무로마치 시대 이전부터 있었고 , 우동은 무로마치 시대에 번성했었던 것으로 본다'는 설(說)은 그야말로 근거가 없는 설(說)에 불과하다. 만약에 우동이나 소면을 일본이 일찍이 만들어 먹었다면 소바키리(そば切)를 만들어 먹지 못 했을 리 없다. 한편 메밀국수로 유명한 심대사(深大寺)의 신(神)도 한국계(韓國系)라고 한다.

이렇듯 밀가루로 만든 면(麵:국수)이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와 밀가루가 아닌 메밀국수로 응용되고 이 메밀국수가 일본으로 건너가 소바키리(蕎麥)가 된 것이다.

소바에 대한 전래는 나가노현 기소군 오쿠와촌 스하라에 있는 정승사의 고문서에서 덴쇼 2년(1574) 3월에 소바를 먹었다는 고문을 1992년 세키모치 씨가 발견하면서부터 알려지기 시작했고 이것이 소바의 시초가 되었으며, 이후 에도시대 초기에는 지방 마을에서 국수 매매가 이루어졌으며 길거리 찻집에서 국수가 제공되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또한 고문에서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사실은 에도 초기에는 소바 집의 간판이 일본 동서 지역 모두 "우동, 소바"로 되어 있어 우동이 면문화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에도 중기가 되면서 간판이 "소바, 우동"으로 바뀐 것을 보면 소바가 인기를 끌게 됐음을 알게 된다.

간사이(교토, 오사카 지역)에서는 우동의 세력이 뿌리깊어 "관서우동, 관동소바" 라는 2대 분식문화권이 형성되었다.

에도중기 초엽인 17세기 말에는 소바, 우동의 다른 말인 "겐돈소바", "겐돈 우동"이라는 명칭이 생겨서 소바가게는 "겐돈야"라고 불렸다. 그 유래는 간분 2년(1662) 가을, 요시하라에 처음으로 생긴 유곽의 이름인 "겐돈"에서 생겨났으며, 같은 시기에 에도쪼 이쪼메의 소바집 주인인 닌자에몽이라는 사람이 소바를 만들어 요시하라의 유곽에서 판매한 것을 계기로 유곽의 이름인 겐돈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그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일본의 소바는 우리의 '메밀국수'다. 이 '메밀국수' 만드는 법을 원진스님으로부터 그 기술을 전수해 일본화 시킨 것이 바로 '소바키리'다. 일본은 이 '소바키리'를 세계시장에 내놓았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의 '소바키리'를 벤치마킹해 오기는 했으나 정작 우리의 '메밀국수'에 대한 연구나 세계화의 노력은 전혀 하지 않는다.

일본은 작년부터 인스턴트 냉면을 출시하고 있다. 곧 냉면조차도 일본화 한 후 세계시장에 내놓을 것이다. 그것도 일제침략으로 대한제국을 붕괴시켜 놓고 대한제국의 황실(皇室)을 이왕가(李王家)로 전락시켜 천황(天皇)의 신민(臣民)화 했던 발상 그대로 인스턴트 냉면의 브랜드를 '이왕가(李王家)'로 하여 한국인을 모욕하고 있다. 면류의 원류가 왜곡되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한국과 일본은 2차 대전보다 더 무서운 식문화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우리는 무대책, 무방비 상태에서 일본에 고비용을 지불하면서 문화식민지화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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